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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기 제작 34년 외길 …‘명장’ 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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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마치고 공방에서 일해야했던 소년이 34년 동안 칠기 제작의 외길을 걷다 명장 반열에 올랐다. 충북 청주의 해봉공방 김성호(51·사진)씨는 14일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한 ‘2008년 명장’ 14명 중 한 명으로 뽑혔다.

김씨의 학력은 1970년 통영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신 유리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족의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그러다 칠기를 만들던 큰 삼촌의 손에 이끌려 공방에 들어갔다. 당시 칠기는 정부의 수출 유망품목으로 지정돼 벌이가 비교적 괜찮았다. 안방에 칠기 장롱을 들여놓는 게 주부의 꿈일 정도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김씨는 “그때 분위기로는 칠기 기술만 제대로 익히면 먹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개껍데기와 씨름을 했다. 손가락에 들었던 피멍이 사라지고 굳은살이 배길 때쯤 자신만의 솜씨를 칠기 가구에 담을 수 있게 됐다.

그즈음 나전칠기분야 전통기법의 대가인 늘가 이성운 선생의 눈에 띄어, 84년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이성운 선생의 체계적인 교육 덕분에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명문대 교수와 함께 작업을 하고, 부인사의 조사전 재건축에 참여할 정도였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2000년 지금 운영하는 해봉공방을 냈다. 그러나 시련은 외부에서 왔다. 90% 이상 수입에 의존하는 조개껍데기의 가격이 계속 올라갔다. 중국산 칠기도 물밀듯이 들어와, 작품을 제값 받고 팔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조개껍데기를 대체할 자연소재를 찾는 일이었다. 2년여의 연구 끝에 계란껍질로 칠기의 문양과 멋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안방문화에서 거실문화로 바뀐 생활패턴에 맞춰 거실용 애기장, TV 거치대 등을 개발했다. 그에겐 8개의 실용신안특허가 있다.

김씨는 “예전엔 자동차보다 장롱이 잘 팔렸는데 요즘은 오히려 칠기 제품을 찾는 사람이 적다”면서도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 이것(칠기)밖에 모르는 게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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