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살아있다>30년만에 첫시집낸 서정춘형님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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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오늘 아침 형님의 첫 시집『죽편(竹篇)』을 받아 우선 아름다운 장정과 형님이 시집을 다 내었다니 하는 놀라움에 단숨에 읽었습니다.신경림(申庚林)선생도 말했지만 30년만에 34편의 시라니 참 놀랍고 저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한편 한편 뼈를 깎듯이 새겨놓은 그 공력 앞에 우선 경의를 표합니다.
젊은 날 애송해 마지 않던 「잠자리 날다」에서부터 「30년전」까지 어느 한편도 형님의 더운 숨길과 서늘한 손길 스치지 않은 시가 없으니 또한번 놀랐고 특히 다음과 같은 시에서는 무언의 시학(!)이 빛나고 있어 동지를 만난듯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어리고,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아가,애비 말 잊지마라/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그곳이 고향이란다』(「30년전」중).제가 아직 초등학생이었을적 대처를 향해 길 떠났을 한 청소년의 아픈 초상이 가슴을 서늘하게 해주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시가 수없이 많지만 이렇듯 절실하고 짤막한 단면으로 전체를 말해주는 시는 없었습니다.바람 부는 동구 앞에서 멀리멀리 손짓했을 한 어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저 역시 어릴적 고향역을 떠나 서울에서 살고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살기 위해 그 정다운 요람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시를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만이라도 제발 고향을 떠날때의 그 초심(初心)만은 잊지말자고 다짐합니다만 그게 말처럼 잘 되지는 않습니다.달리는 열차에서 바라보았던,난간을 두 손으로 움켜쥔채 바라보았던 그 강물이며 새벽산이며 무심한 듯하던 바위들은 다 제대로 있는지….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침묵의 시보다 값싼 떠벌림의 시들이 세상을 온통 쇼단처럼 시끄럽게 지배하고 있는 요즘 시단에 형님처럼 보배로운 존재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자랑같은 것 또한 형님의 시학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것.거기 그냥 빙그레 웃으시며 가만히 계십시오.이슬이며,학이며,돌이며,빈집이며 무엇보다『죽편』이 형님의 반듯한 처소이기에….『여기서부터,-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년이걸린다』(「죽편1」중).

<편집자註:서정춘시인은 등단 30년간 주옥같은 시 단 34편만 창작,지난달 첫시집 『죽편』을 펴냈음.본지 4월13일자 17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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