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심을 품은 버드나무, 박선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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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08면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아호는 널리 알려진 대로 후광(後廣)이다. 그렇다면 DJ의 후광(後光)을 가장 많이 입은 정치인을 꼽으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동교동계에는 내로라하는 핵심 측근이 한둘이 아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인정하는 ‘DJ의 후광 0순위’가 한 명 있다. 바로 박선숙(48) 민주당 의원이다.

박 의원이 DJ를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국민회의 지방선거선대위 부대변인을 맡으면서다. 그 무렵 DJ가 김근태 전 의원에게 “참신하고 능력 있는 부대변인을 한 명 추천해달라”고 하자 김 전 의원이 박 의원을 내세웠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여성 대변인은 물론 부대변인도 찾아보기 힘든 시절, 당연히 내부 반발이 만만찮았다. 박 의원은 성실함과 순발력으로 묵묵히 DJ를 보좌해 나갔다. 매일 오전 5시30분이면 엑센트를 직접 몰고 일산으로 향했다. 잠자고 있는 초등학생 아들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겨두고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시간10여 분을 달려 도착한 뒤에는 모두들 모여 아침식사를 했다.

“늘 미역국이 기본으로 나왔어요. 맛있긴 했는데 참 의아했죠. 미역국 먹으면 시험에서 떨어진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대권 4수를 앞두고도 저렇게 매일 드시니….”

그러던 어느 날 DJ가 참모회의 도중 이런 말을 꺼냈다. “박 부대변인은 겉은 버드나무처럼 부드러운데 속엔 철심이 있어요.” 개인 인물평은 거의 하지 않던 DJ의 ‘철심론’은 한동안 동교동 캠프의 화제가 됐다. DJ의 이 말 한마디가 박 의원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줬음은 물론이다. “그때만 해도 여성 참모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어요. 아마도 남성들 틈에서 고군분투하는 제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나 봅니다. 또 DJ가 페미니스트잖아요(웃음).”

그는 최근 국회 공기업특위에서도 “대통령이 KBS 사장 해임권을 갖고 있다”는 신재민 문화부 차관의 발언에 “국회 입법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직권남용”이라고 몰아붙이며 유인촌 장관을 쩔쩔매게 해 ‘철심론’이 허구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DJ는 9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에도 박 의원을 따로 불러 “청와대에서 계속 나를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정을 보였다. 이후 박 의원은 공보기획비서관·공보수석·대변인을 잇따라 맡으며 5년 내내 DJ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2004년 2월 노무현 정부 때 박 의원이 환경부 차관에 임명됐을 때도 DJ는 “잘 됐다”며 힘을 북돋워줬다. 노 전 대통령도 박 의원을 만 2년 동안 차관으로 중용했다. 동교동계의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이 DJ와 만난 자리에서 ‘유능한 여성 인재를 허락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DJ의 후광 속에 13년을 커온 박 의원도 이제 홀로 서기를 시도하고 있다. 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에 당선되면서다. “몸은 홀로 서지만 지향점은 같습니다. 통일과 민생경제죠. 얼마 전에는 동료 의원 20여 명과 남북관계 연구모임도 만들었어요. 조만간 DJ도 특별강사로 초빙할 겁니다.” 곧 지천명의 나이. 정치인 박선숙의 홀로 서기는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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