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부터 ‘타협의 중심’에 서서 갈등 해결사 돼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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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22면

선진국들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진입할 때 큰 고비를 겪었다. 높아진 국민의 눈높이로 이해관계가 분출하면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골 때문에 시름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축적한 갈등 치유책 덕분에 낙오하지 않았다. 최근 촛불 시위에서 드러났지만 한국도 갈등해법의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 무엇부터 손대야 하나

주된 쟁점은 쇠고기 수입 문제였지만 교육, 공기업 구조조정, 생활고 같은 여러 갈등이 수면 위로 올랐다. 촛불을 매개로 모인 군중이 무언의 교감을 통해 쌓였던 울분을 토해 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커다란 균열이 존재하고 있으며, 성원 간 갈등을 해결하는 기제도 전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 한국에선 중산층의 몰락, 사회 양극화, 다양한 문화의 충돌 등 새로운 갈등 요인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풀려면 신뢰와 제도·질서 같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자본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지리멸렬한 ‘정치 기능’부터 회복해야 한다. 강대국·강소국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신뢰’에 바탕한 거래가 이뤄지는 나라와 반대인 국가의 차이는 바로 ‘정치 기능’이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느냐에 있다. 경제적 이슈도 중요하지만 분출하는 욕구를 흡수하고 완충할 수 있는 ‘정치적 절차(political process)’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정당들이 자기들의 지지세력을 확실해 챙기면서도 타협의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남다른 갈등해법 기제를 가진 스웨덴만 해도 정당들은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한다. 예컨대 사민당은 노동자들이 확실히 챙겨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자영업자들은 국민당이 뒤에서 든든히 받쳐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정당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분출하는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다. 포퓰리즘만 난무한다. 정치가 3~4류로 남으면 해법이 없다.

지금 사회 구석구석에 어지럽게 나타나는 갈등은 ‘집단 이기주의적’ 이해관계를 극복하지 못해 생기는 것이 많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이 일부 집단의 이해관계에 얽혀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사회의 이익과 성원의 이익이 충돌할 때 개인이 무조건 양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이런 갈등을 슬기롭게 풀려면 다양한 욕구가 정치 시스템 안으로 흡수되고 여기서 ‘협력의 결론 도출’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런 시스템이 신뢰를 얻으려면 개인의 이익 보호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한국 국회가 신뢰를 받지 못하는 건 이슈를 결집시키고 해결하기보다 갈등·분열을 조장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 시스템이 중심에 서서 ‘정확한 문제 파악→이해관계자 입장 정리→타협의 중심 찾기→양보와 설득→대안’을 이끌어내는 기능을 해야 한다.
물론 선진국 제도를 무작정 베껴선 안 된다. 우리에게는 공적 제도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기묘한’ 전통이 있다. 갈등이 생겼을 때 교조적으로 선진국의 법과 제도를 찾아 이를 도입하려 함으로써 아무도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드는 사례가 많았다. 법과 제도가 스스로 권위를 찾으려면 사회 성원들이 합의하는, 현실적으로 적합한 내용을 담는 것이 기본이다.

아울러 이해관계 당사자들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각자의 요구에 맞는 최선책이 아니더라도 당사자들이 수긍할 만한 해법을 찾고 이러한 결정에 순응해야 ‘사회적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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