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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무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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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청(淸)대 때 편찬한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는 시가문학의 최전성기였던 당나라 때의 대표작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고전이다. 이 책에 시 22수가 올라 당나라 시인 가운데 4위를 차지한 이상은(李商隱)의 작품은 세밀한 감정 묘사가 특징이다.

그는 연정을 담은 시로도 유명하다. 이런 그의 작품은 대개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 시 한 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만날 때도 어렵고, 헤어질 때도 어렵다/ 봄바람도 힘이 없으니 꽃들이 시든다(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 지영재 편역 『중국시가선』).

추정컨대 그가 연정을 품은 대상은 스스로 넘볼 수 없는 높은 지위의 여인이었다. 시에서 묘사한 여인네의 모습이 대단한 귀족 이상의 사람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차림새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그저 이야깃거리로 남기는 대신, 주목하고 싶은 것은 ‘봄바람도 힘이 없으니…’라는 구절이다.

봄바람은 꽃들을 일으키는 힘의 근원. 중요한 곳에 힘이 빠지면 나머지의 것들도 쇠락을 면치 못한다는 얘기다. 시인은 연인을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표현했지만 요즘 중국 용례는 다르다.

주식시장에서는 대표적인 주식이 급락하면서 나머지 주식이 동반하락할 때 이 구절이 가끔 사용된다. 정치적으로는 핵심 기구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정책 전반에 문제가 생길 때 쓸 수 있다.

이상은의 연시를 떠올리는 이유는 한국 정부의 전반적인 무력감 때문이다. 1500여 명의 시위대가 벌인 도로 점거 불법시위에 경찰은 넋을 놓고 대응도 못했다. 두드려 맞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만 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으로 내걸었던 공기업 개혁도 여론의 눈치를 보는지 뒤로 미룬 모양새.

안에서만 문제가 아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도발에 무기력한 모습을 연출했고,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에서는 북한의 외교적 공세를 관리하지 못했다. 안팎으로 무기력 증세가 줄줄이 빚어지는 모습이 장마철 비에 여기저기 새는 지붕 같다.

탐미적이지만 나약한 표현을 주로 사용했던 이상은이라는 시인은 세기말적인 문인이다. 음울하기만 했던 그의 시가 다시 이 정부의 모습에 얹혀지는 까닭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집권당 원내대표도 한심했던 모양인지 “정권교체 왜 했는지 답답하다”는 심사를 털어놓는다.

무력증의 근원을 찾아야 할 일이다. 컨트롤타워인 청와대가 제 역할을 못하면 힘없는 봄바람이다. 큰 줄기를 잡아 원칙을 똑바로 세우지 못하면 결과는 뻔하다. 증세를 다스릴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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