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존 버거 발견한 후‘허기’잊고 일에 재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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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숙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일로 먹고살고 있지만, 정작 미술사나 미술이론서를 통해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동서양 미술사의 여러 걸작들을 도해한 글들 또는 맥락을 추측해야 구체적인 독해가 가능한 미술이론서들은 뭐랄까 좀 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취미로서야 포만감을 줄 수 있었겠지만 막상 이쪽 분야에서 평생을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지침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허기가 느껴졌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존 버거라는 저자를 발견하고는 어?했다. 재미도 있고 할 만도 한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상커뮤니케이션과 사회』로 번역된 『Ways of Seeing』이라는 책은 말 그대로 ‘본다’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크게 바꿔주었다. 특히 회화와 광고,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텔레비전과 책, 이미지와 텍스트를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상당히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미술사의 대표적 거장 중 하나인 피카소를 다소 삐딱하게 풀어본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는 평소에 이 ‘마초’ 작가에 대해서 갖고 있던 불만을 상당 부분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작가론의 매력을 한껏 맛보게 해주었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은 이미지도 시(詩)가 될 수 있다는, 혹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전혀 다른 시적인 경지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해도 좋을 만큼 감동적인 책이었다.

나중에는 『결혼을 향하여』를 비롯한 소설책들이 잇따라 번역되어서, 스토리를 다루는 존 버거의 솜씨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물론 이제는 존 버거의 새 책이 나와도 예전처럼 바지런히 찾아 읽지는 못한다. 새삼 존 버거의 책들을 일별하면서 그가 단지 미술평론가. 미술사가로서뿐 아니라 소설가·극작가·시나리오 작가·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채롭게 활동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정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이쪽 ‘업계’에서 그런 새로운 직업군을 탐색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존 버거를 보면서 다시 생각해볼 문제가 생긴 것은 반가운 일일까 아니면 씁쓸한 일일까.

백지숙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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