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외교안보 라인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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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보여준 이 정부의 외교 행태는 실망을 넘어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금강산 피살사건’ 해결을 위한 문구를 무턱대고 의장 성명에 포함시키려다 실패했다. 특히 의장국인 싱가포르가 이미 확정한 성명 내용을 뒤늦게 수정해 달라고 간청하는 추태도 보였다. 한국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금강산 사건’의 해결을 위한 국제적 대북(對北) 압박에 주력했다. 북한은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에서 채택됐던 ‘10·4 선언’의 이행을 주장했다. 그러자 싱가포르는 양측의 주장을 담은 의장성명을 발표하려 했다. 문제는 ‘10·4 선언에 기반을 둔 남북대화의 지속적 발전에 강력한 지지를 표한다’는 표현이었다. ‘10·4 선언’을 다른 남북 간 합의들과 묶어 그 이행을 논의하자는 이 정부의 대북정책의 원칙상, 이런 명시적 표현은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북한 측 요구만 삭제할 수 없다고 강하게 나왔다. 결국 정부로선 ‘금강산 피격 사망 사건 조속 해결 기대’라는 요구도 함께 삭제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싱가포르의 입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의 한심한 지경에 이른 가장 큰 이유는 이 정부의 오만과 무지다. 북한은 이번에 아세안 국가들과 우호협력 조약을 맺는 등 최근 이 지역에 공을 들여 왔다. 또 싱가포르는 양자 간 균형을 중시하는 국제외교 관행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이들 국가의 움직임을 경시했다. ‘북한이 뭘 하겠나’ ‘싱가포르가 우리 편을 들지 않겠나’ 하는 안일함에 빠졌던 것이다.

이번 사태로 우리의 대외관계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됐다. 비록 구속력은 없다고 하지만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국제회의의 의장성명 내용을 바꾸자고 나서니 어느 국가가 한국에 대해 신뢰하겠는가. 대북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금강산 규명’을 위한 국제적 압력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그 대신 북한엔 향후에도 ‘10·4 선언’ 이행을 국제회의에서 제기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북한에 외교적 완패를 당한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정권 외교안보 라인의 무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국민이 적지에서 피살된 사건에 대해서도 허둥지둥하더니 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대증(對症)요법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것이다. 이러니 외교안보 라인 전면 개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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