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승삼칼럼>착한 사마리아人 규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다른 나라의 형법에는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 규정」이라는 게 있다.예를 들어 프랑스 형법 63조2항은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해줘도 자신이나 제3자에게 위험이 없는데도… 도와주지 않는 자는 3개월에서 5년까지의 징역과 3 백60프랑에서 1만5천프랑까지의 벌금을 물거나 이 둘중 한가지를 받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착한 사마리아인」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유명한 예수의 비유다.강도를 만나 죽게된 사람을 제사장도,레위사람도 그냥 지나쳤으나 한 사마리아인만은 성심껏 돌봐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내용이다.
서유럽 14개국과 미국의 31개주가 이런 「착한 사마리아인 규정」을 형법에 두고 있다.지난날 사회주의국가들의 형법에도 대개 들어있었다.
다소 놀라운 것은 1905년에 제정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형법인 형법대전(刑法大典)에도 「착한 사마리아인 규정」에 해당하는 「견급불구율(見急不救律)」이란 규정이 엄연히 있었다는 점이다.즉 형법대전 제4편 제14장 잡(雜)법률 제 7절 제675조에는 「동행(同行)이나 동거한 사람이 타인을 모해(謀害)함을 지(知)하고 조당(阻當)치 않거나 수화(水火)나 도적(盜賊)의 급(急)이 유(有)한데 구호치 아니한 자는 태일백(笞一百)에 처함」이라고 돼 있는 것이다.수화 의 경우도 넣어 재난신고의 의무까지 부과하고 있는 점에선 오히려 서구의 법규정보다 포괄적이고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1953년 부산 피난지에서 형법을 새로 만들면서 정부원안에는 들어 있었던 이런 규정이 국회 심의과정에서 그만 삭제됐다는 것이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방금 소매치기 당해 소리를 질러봐도 대개는 당한 사람만 바보가 되고마는 오늘이다.길 가다 깡패들에게 봉변당했을 때 주위를 믿고 오기를 부렸다가는 목숨 안잃는게 다행인 결과가 된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아닌 「독존(獨存)」의 형편이다.이런 현실을 웅변하듯 거리 여기저기에는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뺑소니사고 관계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마치 도덕성과 시민정신의 실종을 광고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다. 엊그제만 해도 한 여성이 행인들이 보는 가운데 성폭행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그런가 하면 정신질환자가 탈취해 모는 버스를가로막다가 부상한 택시기사는 표창은 커녕 치료비도 못받아 석달이 넘도록 병원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는 보도도 있 었다.
「착한 사마리아인 규정」에 대해선 「도덕의 왕국」에 속해야 할 것을 「법의 왕국」으로 내모는 일이 과연 타당하며 바람직한것인가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야스퍼스 같은 사람은 『도덕의 의지는 한번 법칙화하면 자유의 질곡이 된다』 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에서 우러나온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마저 이기주의와 편의주의에 가려진다면….또 어차피 우리의 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공동선을 위해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것을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오병선(吳炳善)서강대교수는 94년 12월에 열렸던 「자유공동체 윤리의 정립에 관한 법정책적 과제」라는 학술세미나에서 구체적으로 이런 시안을 제시한바 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명백하고 급박한 위험을 목격한사람중 직접 개입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를 돕지 않은 사람,즉시 해당 관청이나 기관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그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큰 위험부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은 최고 까지의 징역,최고 까지의 벌금 또는 두가지 모두로 처벌한다.』 하기는 가스에 중독된 사람을 구하려고 자신의 산소마스크를 벗어 씌워 주었다가 목숨을 잃은 소방관과 같은 의로운 사람도 적지 않다.꺼져가는 해외동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골수를 나눠주겠다고 줄을 잇는 모습도 우리는 보아왔다.
또 「착한 사마리아인 규정」이 마련되더라도 선의와 공동체의식을 북돋워 나갈 수 있는 다른 법과 제도가 마련되지 않으면 앞에서와 같은 택시기사는 또 나올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상황이 「하늘의 별」과 같은 「내 마음의도덕률」에만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는 분명치 않다.『사람살려』는 절박한 외침도 메아리조차 지지 않는 상황이다.남의 곤경을 외면했을 경우 물볼기 1백대로 다스린 선 조의 지혜를 되살릴 만하다.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