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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샷 했던 와인의 비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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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해요! 내가 가장 아끼는 훌륭한 와인을 하나 가지고 왔어요.” 와인이 무언지도 몰랐던 시절, 알게 되었던 어느 와인애호가인 미국인 친구가 내 생일 파티에 와인을 가지고 왔었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와인을 진지하게 마시기 시작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어머 그래요 ?" 무슨 와인이죠? 일로 인해 늦게 도착한 그가 가지고 온 와인을 낚아채듯 잡고는 와인 병을 따면서 물었다. 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저렴한 가격대의 와인들로 한끝 취기에 있는 상태였다.

“저 그게… 프랑스 와인입니다" 수줍음도 많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지만 난 별로 개의치 않았고 와인은 이미 잔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취기에 있었지만 레드 와인이 주는 부드러움과 향기로움이 코끝을 자극하였다. 평소 마셔보았던 와인들과 전혀 달랐다.

“와! 이 와인 좋은데요… 얘들아 원샷 !!!”
우리는 단숨에 그 와인을 비워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잊지 못할 비애의 추억(?)이 될 줄이야…” 그는 멍하니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잔에 채워진 와인을 그대로 들고 얼어 붙은 듯이… 황당한 표정이 역력했다. 뒤이어 허탈한 표정으로 서서히 변하는 그의 모습에서 난 무언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성질 급한 덜렁이가 또 사고 쳤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그 순간을 빨리 모면해야만 했다.
"와! 이 와인 너무 맛있네요… 뭐죠?”
멍한 표정의 그가 공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샤또 페트뤼스…" 그리곤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무슨 소린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한 동안 그 순간이 머리 속에 남아 나중에 그 와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와인을 좀 한다는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뭐! 뭐라고??? 그게 백 만원도 훨씬 넘을 거라 구?" 당시엔 100만원도 넘는 와인이었으나 지금은 적어도 200만원 이상은 주어야 하는 와인 이었다.
그날 마셨던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의 포므롤(Pomerol) 지방에서 생산되는 최고의 와인으로 알려진 샤또 페트뤼스(Chateau Petrus)였다. 지금도 빈티지는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더욱 아쉬운 것은 나의 와인에 대한 "무식"을 확실하게 보여준 꼴이 되었고 그 순간은 지금까지도 창피하게 느껴진다.

와인은 음미하는 것이지 빨리 마셔서 취하는 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훌륭한 작품 같은 와인을 가지고 ‘원 샷’ 한다는 것은 와인에 대한 모독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미국에 있는 집의 셀러에 고이 보관하면서 아끼던 와인을 가지고 온 그의 기대감을 한 순간에 묵사발 시켜 버린 것이다.” 그 이후론 그는 나에게 와인을 가지고 오지도 않았고 내 앞에서 와인을 마시지도 않았다. 하기야… 흰색은 화이트 와인 그리고 붉은색은 레드 와인 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그러한 와인을 선사한 그는 지금도 무척 후회했을 것이리라….

그 사건(?) 이후, 난 와인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바로 와인 기초 공부부터 들어 갔다. 물론 와인을 마실 때에는 와인라벨부터 확인하는 버릇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젠 와인의 색, 향기 그리고 맛을 충분히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기도 했다. 분명 그 사건은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한 희미한 획을 그린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 샤또 페트뤼스를 한번 더 접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엔 좀 더 맑은 정신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마셨다. 당시, 난 소규모 와인 클럽 모임을 가지고 있었고 멤버 중 하나가 프랑스 출장에서 가지고 온 1978년산 샤또 페트뤼스 였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나무열매들과 버섯의 향기 그리고 흙과 어우러진 나무 타는 향기는 깊은 산속의 정취가 연상되었고 매우 부드러운 진흙을 입안 가득 담은 듯 매끄럽게 넘어가는 촉감과 뒤에 남는 깊은 여운… 한 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난 좀 더 깊이 와인에 빠지게 되었다. 아니 미쳤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경험한 그 와인의 유사한 맛과 향기들을 좀 더 많이 느끼기 위해 난 나의 안정적인 직업을 버렸고 아직까지도 미개척 세계라 할 수 있는 와인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최고의 와인에서 느껴지는 향기와 질감 그리고 여운들은 비싸지 않은 와인들에서도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저렴한 가격대의 와인에서 최고의 와인들이 풍기는 향기로움과 감촉 그리고 그 훌륭한 맛을 찾는 것이 와인 애호가가 갖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 샤또 페트뤼스(Chateau Petrus)에 관하여

프랑스의 최고 와인들이 생산되는 보르도의 뽀므롤(Pomerol)지방에 위치하고 있는 특급 와이너리이다. 이 와이너리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같은 강인한 스타일의 품종을 이용하는 다른 보르도의 와인들과 달리 거의 100% 내지는 완전히 100%의 멜로(Merlot) 품종만을 이용하여 꽤 묵직하면서도 매력적인 부드러움을 지닌 깊은 맛의 와인을 만들어 낸다.

Jean Pierre Moueix (쟝피에르 모엑스)사에서 운영되는 샤또 페트튀스는 1년에 2700 케이스(32,400병)만 생산된다. 그 희소성으로 인해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와인 중 하나로 추대되고 있으며 91년처럼 작황이 좋지 않았을 경우 아예 생산을 포기하기도 할 정도라 한다.

전세게 와인 애호가들이 늘어나면서 이젠 이 와인은 그 가치가 매일 달라지고 있다. 오래되거나 좋은 빈티지의 경우 경매에서나 만날 수 있으며 부르는 게 값이 되어버렸다. 국내에서는 적어도 200만원 이상은 주어야 이 와인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와인 애호가들은 그에 버금가지만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아 저렴할 수 있는 유사한 와인의 맛과 향기를 품고 있는 와인 보물 찾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성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