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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地圖>문학8.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이 도시에 서울예술전문대가 있다는걸 일러준 분은 고등학교때 국어선생님이셨다.
그 속에 문예창작과가 있다고 그곳에 가라 하셨다.그때만 해도대학에 문예창작과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나였다.학교가 남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 울역에 내려 남산타워를 향해 걸어걸어 한나절만에 학교를 찾아냈던 기억이 난다.
퇴계로에서 내렸으면 10분이면 되는 거리를 서울역에 내려 그고생을 했었다.그 당시의 내겐 그저 남산이란 남산타워였으니.하지만 내게 그 학교는 보물 찾기의 보물이었다.10분이면 찾아낼걸 한나절만에 찾아낸 보물이었다.처음 얼마간은 그 곳이 나의 보물인지를 모른 채 너무나 자유로운 분위기에 적응을 못해 쩔쩔매기는 했다.
얼마나 괴짜들이 많았는지 모른다.아무데나 주저앉아 시를 쓰는사람,덥다고 옷 다 입은 채로 연연동산 아래의 분수대에 텀벙 빠져드는 사람,나는 그때껏 책이나 읽고 있는데 소설이며 시를 한권 분량이나 마스터 인쇄를 해 나눠주는 사람, 학교 밑의 술집에 온종일 앉아있는 사람….
그 속에 그저 단발머리에 티셔츠와 운동화 차림으로 섞여 여기가 어디지 하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했으나 나는곧 그 학교가 좋아졌다.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가 있었고,그 읽은 책들이 곧 교재여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 다.시험도 따로 없었다.작품이 곧 시험이어서 아무리 리포트 작성을 잘 해도작품을 못내면 성적이 나올 수 없는 분위기였다.
작품을 쓰는 일이 곧 성적으로 연결되었으니 얼마나 신이 나는가. 덕분에 나는 그곳에서 체계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며,습작으로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평론도 쓰고 희곡도 써볼 수 있었다.읽고 쓰고 걸어다니고 노는 일이 학교 생활이었다.
지면에서나 뵐 수 있었던 분들을 은사로 섬기며 그 2년을 통과해오면서 나는 비로소 문학적인 분위기를 터득할 수 있었다.내겐 그 문학적인 분위기의 터득이 곧 보물이었다.학교를 떠나게 되었을 때의 막막함이 생각난다.몸은 졸업을 했는데 마음은 졸업하지 못해 참 오랫동안 그 근처를 서성였다.
그런 마음이 내 마음 만은 아니었는지 그 근처를 서성이다 보면 옛 친구들과 우연히 조우하기도 했었다.
십몇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 중의 얼마는 작가생활로 들어왔다.
서로의 청춘을 기억하고 있는 동료가 된 셈이다.
나는 체질상 공적인 일에 즐겁게 참여를 못하는 사람이다.그래서 좋은 동료,좋은 선배 노릇을 못하고 있다.하지만 명동과 남산을 캠퍼스 삼아 보냈던 그 짧은 기간에 내가 만난 은사,내가만난 동료들이 내겐 내 태생지와 비슷한 텃밭이 돼 있음을 거의10년이나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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