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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사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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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술을 빚는다는 ‘양(釀)’은 씹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옛날에는 익힌 곡물을 잘 씹은 뒤 야생 효모로 발효시켜 술을 만들었다. 침 속의 디아스타아제라는 효소가 녹말을 당분으로 바꾼다. 효모는 이를 분해해 알코올을 만들어 낸다. 술을 빚는 일은 신성했다. 오직 여성 무당만이 곡물을 씹을 수 있었다. 양조법이 간편해진 것은 누룩이 등장하면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일이다. 알코올용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여진족은 술을 ‘누러’ 또는 ‘누륵’이라 불렀다. 누룩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일본 『고사기』에 따르면 서기 300년 무렵 백제에서 건너간 수수보리(須須保利)가 누룩으로 술 빚는 기법을 전수했다. 그는 일본에서 주신(酒神)으로 추앙받는다. 일본에선 쌀로 빚은 청주를 사케(酒)라고 부른다. 요즘 국제적으로는 니혼슈(日本酒)라 통용된다. 사케가 한반도에 역수입된 것은 일제시대. 부산의 일본 양조업자가 ‘마사무네(正宗)’를 내놓아 대박을 터뜨렸다. 막부시절 이름난 칼을 만든 대장장이에서 따온 상표다. 이후 한국에선 한자 발음인 ‘정종’이 사케의 대표명사로 굳어졌다.

일본에선 사케용 벼를 따로 재배한다. 일반 벼보다 알갱이가 훨씬 크고 값은 두 배나 비싸다. 사케는 쌀 정미율과 알코올 함유량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구분된다. 정미율 50%의 쌀을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발효시킨 다이긴조슈(大吟釀酒)는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참고로, 우리가 먹는 쌀의 정미율은 90%다. 그 뒤를 긴조슈(吟釀酒)·준마이슈(純味酒)·혼조조슈(本釀造酒)가 잇는다. 사케의 값은 천차만별이다. 물 맑고 쌀 좋은 니가타산 명주들은 720mL 한 병에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간다. 왕실에 진상한다는 니시키노마노즈루(錦の眞野鶴)나 고시노간바이(越乃寒梅)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젊은 애주가들이 사케에 취하고 있다. 올 상반기 사케 수입이 259만 달러를 넘었다는 소식이다. 지난해보다 73.8%나 늘어난 수치다. 사케가 와인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서울 강남부터 생겨난 사케바들도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그렇다고 분통을 터뜨릴 일은 아니다. 일본 샐러리맨들은 우리 소주에 취한 지 20년이 넘었다. 소주는 위스키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는다. 한국산 소주의 대일 수출은 연간 1억 달러에 육박해 사케 수입의 20배가 넘는다. 양국의 젊은이들은 사이좋게 술잔을 주고받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가 갑자기 독도 문제를 들고 나와 뒤통수를 쳤다.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25%인 반면 사케는 15% 남짓으로 밍밍하다. 왜 일본이 독한 한국을 건드리는지 궁금하다. 요즘 한국에도 순한 소주를 즐긴다는 국가 기밀이 새어나간 것인지….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