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워싱턴發 기사의 종착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정치철인 요즈음 독자들이 북한관련기사에 얼마나 관심있는지 알길이 없다.그러나 주의깊은 독자는 간혹 1면을 장식하는 북한기사의 진원지가 서울이 아닌 워싱턴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대북(對北) 쌀지원을 둘러싼 한.미.일(韓.美.日)간 협의 보도는 회의에 참석한 우리측 관리의 기자회견보다 워싱턴발 기사가 사실에 가까웠음이 밝혀졌다.김정일(金正日)의 동거녀였던성혜림(成蕙琳)사건의 새로운 대목도 대부분 미국발이 었고 북.
미(北.美)간 미사일회담 소식도 성급하긴 했지만 진원은 서울이아니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독자들은 한반도의 장래가 남북한간에 논의돼야한다는 정부의 주장과는 거리있는 현실에 접하고 있다.북한에 관한 뉴스는 그 진위(眞僞)를 떠나 서울이 아닌 워싱턴에서 만들어지고 이같은 추세는 계속될 듯하다.
문제는 기사를 「만드는」워싱턴특파원이나 기사에 접한 국민들의반응에 「믿지 못할 미국」에 대한 일말의 「배신감」이 스며있다는 점이다.광주사태와 관련,최근 공개된 비밀문건은 새로운 사실여부를 접어두고라도 미국을 다시보는 빌미를 또 한차례 제공했다.지난날 미국의 한국정책에 관한 비사(비史)가 속속 알려질 때마다 우리들의 불신감은 깊어갈 것이다.독도(獨島)문제로 국민들을 화나게 했던 이웃 일본과 미국의 정상(頂上)들이 오는 4월다시 만나 양국간 안보유대를 과 시할 때 우리는 미국에 대해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 미국을 감정으로 대하는 일은 의미도 없고 또 통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됐다.북한 스스로 자충수를 두지 않는 한 북.미관계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그렇다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가 소 원(疎遠)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편 우리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상당히 손상되었다는 미국 친구들의 우정어린 충고도 가볍게 들어선 안된다.그리고 그 이유는 정책이 다분히 감정에 휘둘린 데 있었음을 부인해서도 안된다.모호한 국민정서에 깊은 생각없이 따 랐던 결과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4월 총선이 끝나면 한국독자들은 보다 자주 북.미관계 기사와만나게 될것이다.왜 총선후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면 앞서 말한 돈독한 한.미(韓.美)관계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그때도 여전히 배신감 운운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우 리에게 미국은무엇인가」를 놓고 한국의 지식인들은 국민앞에 공론(公論)을 펼쳐주길 바란다.상대방에 대한 환상(幻想)을 떨치는 노력이 제목소리 내기에 앞설 일이다.
길정우 본사 在美 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