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지겨운 '이념'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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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념싸움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 1989년 소련붕괴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2백년에 걸친 이데올로기 역사에서 좌.우익싸움 혹은 보수와 혁신의 대립이 정치권을 늘 격돌시켰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유명한 대니얼 벨교수에 의하면 이념은「세속적 종교」다.종교의 특징은 집요한 싸움이다.어느 한쪽이 사멸(死滅)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이념싸움 또한 「종교」라는말이 붙을 정도로 치열하고 격렬하게 싸우는 속성을 갖고 있다.
우리도 남북분단의 역사만큼 이념싸움의 역사는 길다.그러나 그것은 남과 북간의 관계에서고,남한내에서의 싸움은 실은 이념싸움이 아니라 권력싸움이다.남한내에서 이념은 모두 자유주의이고 보수주의다.이 자유주의 보수주의자들간의 싸움은 누가 옳고 그른가의 가치(價値)싸움이 아니라 누가 권력의 핵에 서고 누가 권력의 주변으로 밀려나는가의 권력싸움이다.
60년대 이래 우리는 두개의 세력이 이 권력장악을 위해 맞붙어 왔다.그 하나가 「산업화세력」이라면,다른 하나는 「민주화세력」이다.산업화세력은 군출신 정치인과 테크노크라트가 주도했고,민주화세력은 민간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됐 다.산업화세력이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화하는 집권화(集權化)지향이라면 민주화세력은 권력을 사회내 하위부문으로 분산하는 분권화(分權化)지향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이 두 세력은 불공대천지원수처럼 갈등관계를 야기시켰다.산업화세력은 민주화세력을 산업화의 장애요인으로 생각했고,민주화세력은 산업화세력을 민주화의 저해요인으로 인식했다.그러나 어떻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산업화에 성공해 1인당 GNP 1만달러시대에 들어섰다.민주화세력이 어떻게 사고하든오늘날 우리의 발전은 이 산업화세력의 공이다.그들의 정치력,그들의 추진력 없이도 우리가 이렇게 발전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주장할 수 없다.그들의 국가관리 능력은 평 가받고도 남음이 있다. 민주화세력 또한 산업화세력이 어떻게 말하든 오늘날 우리의 민주화에 그 공이 지대했음은 더 이를 여지가 없다.그들의 고통을 절(絶)하는 투쟁 없이 80년대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90년대의 민간인출신 대통령이 나왔을 것이라는 보장은 그 누구도할 수 없다.아시아 여러나라들중 우리가 가장 민주화하고 있음은적어도 상당부분 그들의 투쟁결과다.
산업화세력은 산업화에 성공했고 민주화세력은 민주화에 성공했다.서로가 서로의 발전에 부정적 요인으로,서로의 존립에 적대적 요인으로 인지하는 투쟁속에서도 두 세력은 각기 목적하는 바를 달성했다.그럼에도 두 세력은 아직도 서로 부정하고 증오하고 있다. 민주화세력은 산업화세력을 군사반란자들이고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이라고 부정하고 실패한 사람들로 규탄하고 있고,산업화세력은 민주화세력을 오도(誤導)된 개혁주의자,급진적 파괴주의자,위기관리능력없는 무능력자들이라고 쏘아붙이고 있다.민주화 세력은 산업화세력을 숙정해야 역사가 바로 선다고 하고,산업화세력은 민주화세력을 저대로 뒀다간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거기에는 이념도 없고 가치도 없다.정책도 없고 공약도 없다.
오로지 헤게모니 쟁탈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 세력은 깊이 자성해야 한다.60년대 이래 초기 산업화과정에선 두 세력이 충분히 갈등관계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호보완관계라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산업화에 계속 성공하지 않고는 민주화할 수 없고,민주화를 계속 추진하지 않 고는 산업화가 계속 진행될 수 없다.산업화세력을 몰아내면 역사도 거꾸로 가고 민주화세력도 죽는다.민주화세력을 몰아내면 발전도 거기서 중단되고 산업화세력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도 두 세력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거꾸로 생각하면서 역사를 바로세우고 있다고 말하고,거꾸로 행동하면서 국가를 바로잡자고 주장한다.
송복(연세대 정치사회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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