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갈피 접힌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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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정국(1955~) '갈피 접힌 책' 부분

갈피 접힌 책은 고요하다
긴 긴 문장들도
뜻을 접고 앉아서 쉰다
왜 이쯤에서 갈피를 접었을까
갈피 접은 뜻을 알 수 없다 언제쯤 읽다만 페이지일까

갈피 접힌 책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여긴 내가 밑줄 친
세간(世間)의 얼룩도 없다
누가 이 책에 갈피를 접고 간 것일까
갈피 접힌 뜻을 알 수 없어

또 누군가가 황혼녘의 서가를 뒤진다
(후략)



갈피가 접힌 책을 볼 때가 있다. 아무 표식도 없고 그냥 비스듬히 한쪽이 접혀 있을 뿐인데 접힌 쪽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누군가 그곳 어딘가에서 잠시 머물다 간 흔적, 그곳 어딘가에서 인식의 꽃구경이라도 한 흔적이 있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렇게 생의 황혼녘까지 고요한 서가를 뒤지고 있노라면 언젠가 당신이 모르는 어떤 신이 문득 접어 두고 간 책갈피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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