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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포기하지 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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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인 제주 용암동굴군이 등재 1주년을 맞았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만장굴은 그 가운데 으뜸이다. 규모나 지질학적 가치, 경관의 아름다움은 세계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총길이 10㎞가 넘는 만장굴은 현재 일부 구간만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꽤 오래전 이 동굴의 전 구간을 탐사해본 적이 있다. 몇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탐사대 가운데 여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지의 동굴 탐사치곤 불안하기만 한 구성이다. 시원찮은 성능의 헤드랜턴과 헬멧을 쓰고 배낭엔 예비 배터리를 한 짐 챙겨 넣었다. 물과 약간의 식량도 준비했다.

별 관심이 없던 때라 기초적 탐사지도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동굴의 끝에 출구가 있다는 경험자의 말이 이곳에서 고립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의 전부였다. 비공개 구간에 막혀 있는 철책 너머는 암흑의 세계다. 오로지 랜턴의 불빛만이 유일하게 발 앞을 비춰준다. 아무나 가보지 못할 만장굴을 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행은 들떠 있었다.

유쾌하게 얘기를 나누며 가볍게 발길을 내디뎠다. 남은 거리는 9㎞ 남짓. 현재의 속도로 걷는다면 두세 시간 만에 반대편 출구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은 정지된 듯했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걷고 또 걸어도 동굴 내부의 모습은 출발 지점과 다르지 않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보이지 않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가를 뿐. 그렇게 한참을 더 걸었다. 시계를 보니 겨우 한 시간이 흘렀다.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은 물결치듯 굽이굽이 이어진다. 흐름의 흔적이 멈춘 곳에 쌓인 날카로운 파석의 무더기만이 지나온 거리를 증명한다. 겨우 몸 하나가 빠져나갈 공간을 지나자 광장이 나타났다. 동굴 천장엔 박쥐 떼가 까맣게 매달려 있다. 인기척에 놀란 박쥐가 날며 내는 고주파 음이 날카로웠다. 만장굴은 외계와 차단된 생명의 밀실이었다.

두 시간이 더 흘렀다. 계산대로라면 끝이 보여야 한다. 가도가도 끝나지 않는 어둠은 공포로 변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일행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의 확신도 당장 확인할 방법은 없다. 온 길로 되돌아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공포를 이길 좋은 방법일망정 탐사의 기쁨은 포기해야 할 악수였다.

내분이 일었다. 이곳으로 오자고 한 이에게 원망을 퍼부었고 안전의 책임을 따졌다. 서로 고성이 오갔고 자칫 치고받는 싸움이 일어날 기세였다. 싸움을 진정시킬 유일한 방법은 동굴의 출구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의 공유가 전부다. 잠시 앉아 토론을 벌였다. 흥분이 진정되고 계속 가보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합의의 이유란 포기의 오명을 누구도 뒤집어쓰기 싫어서랄까.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아는 노래를 다 해보았지만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평소 꺼내지 못한 속 얘기도 다 털어놓았다. 모두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여전히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동굴의 출구가 있다는 사람들의 말은 사실일까. 함께 걷고 있지만 각자의 머릿속은 공포를 넘어 죽음의 위험을 상상하고 있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네 시간이 흘렀다. 발걸음은 힘이 없었고 랜턴의 불빛마저 희미해져 갔다. 이제 돌아갈 수도 없다. 지나온 절망의 시간을 또 반복해야 하는 탓이다. 오기로 희망을 맞이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어둠은 죽음처럼 무거웠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끝이 보인다!”

어둠 너머로 희미한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일행은 모두 뛰고 있었다. 다가선 굴의 끝은 하늘과 맞닿아 거대한 빛의 다발이 수정처럼 투명하고 단단하게 쏟아졌다. 부신 눈은 현기증을 일으켰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살아있음을 감사했다. 끝이 궁금해 나간 길은 빛으로 뒤덮인 희망의 모습이었다.

윤광준 사진가·오디오 전문가

◇약력=프리랜서 사진가·작가,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 저서 『잘 찍은 사진 한 장』『윤광준의 생활명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