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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과거 청산과 카오스 이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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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문사에 상벌심의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특종을 했거나 좋은 기획기사를 쓰면 상을 주고,기자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렀거나 회사에 유.무형의 피해를 끼쳤을 경우 벌을 주는 심의기구다. 지난해 이런 일이 있었다.기자 두 사람이 일본의 교포 화가를 방문해 작품 사진도 찍고 취재를 마쳤다.한국에 알려지지도 않은 자신을 찾아 일본까지 온 기자가 고맙다고 화가는 눈물을 글썽이며 판화 한 점씩을 선물로 주었다.이 사실이 알려져 징계대상이 됐다.사건조사팀의 경위설명이 있었고 당사자들의 변명도 있었다.다수 위원들이 그 정도면 관행으로 봐줄 수 있다 했지만소수 의견은 그렇지 않았다.기자들이 언론정화를 위해 촌지 안받기 성명서를 낸지가 엊그제인데 취재 를 기회로 20만원 상당의선물을 받았다면 이는 명백한 유죄라는 주장이었다.결국 두 기자는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만큼 언론계 풍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전의 풍토와는 크게 달라졌다.검찰 압력을 받아서도 아니며 대통령이 지시했다고 이뤄진 일도 아니다.자율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살기 위해 옛날의잘못된 관행을 고치자는 대세의 흐름에 따라 이뤄 진 개혁작업이다.물론 언론계 풍토가 청정(淸淨)해안처럼 맑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니다.워낙 많은 숫자의 기자가 있으니 경우에 따라선 악덕기자나 과거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자도 없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대세는 달라져 있고 언론 환경은 이렇듯 바뀌어 있다. 이런 시점에서 전두환(全斗煥)씨의 언론계 비자금 살포설이 흘러나왔다.검찰이 흘렸는지,우연히 흘러나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비자금 살포설은 또 다른 과거청산의 술렁거림으로 이어지고있다.이 신문은 저 신문을 손가락질하고,젊은 기자 는 늙은 기자를 의심한다.언론계 비리를 뽑을 호기(好機)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언론 길들이기 일환의 공작이라는 설도 있다.
이중 가장 고약한 소리가 「전두환 장학생」을 찾으라는 외침이다.이 주장은 한 단계를 넘어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의 총론엔 합의하는 척 하면서 각론에 시비를 거는 자들이 바로 5공 언론세력이라는 인민재판식 세몰이로 이어질 공산이 크 다.역사 바로세우기에 찬성하면 문민 언론인이고,시비를 가리자면 5공 언론인이라는 낙인이다.이야말로 먹은게 있으니 5공을 봐주고,먹은게 없으니 문민정부를 깐다는 구시대적 촌지론에 근거한 발상이다.권력과 이권에 가까운 부서나 출입처를 가졌던 고참 언론인이라면 적어도 몇천만원씩은 받지 않았겠느냐는 지레 짐작과 나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오십보백보식 부재자(不在者)증명에서 출발한역겨운 순수.비순수 논쟁이다.
자세한 것은 전두환씨 공판에서 밝혀질는지 모르지만 살포설과 동시에 벌어지는 언론계 내부의 이런 식 과거청산 주장은 개혁보다는 청산,죄보다는 벌에 치중하는 정치권의 과거청산 작업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누가 돈을 줬느냐,누가 얼마를 받았느냐는 등 따질 수도 없는 일에 온 세상이 골몰하면서 몇몇 사람을 속죄양으로 들러리를 세우고는 청산은 끝났고 개혁을 달성했다는 식의 과거청산 작업은 결코 개혁으로 연결되지 않는 역사 무덤파기의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지나지 않는 다.누가 옳고 그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젊은 기자는 늙은 기자를 손가락질하고,여론은 언론을 향해 불신하고 등을 돌리는 혼돈만 가져올 뿐이다.
먼 옛날 남쪽 바다 임금인 숙(숙)과 북쪽 바다 임금 홀(忽)이 중앙의 임금인 혼돈(混沌)의 초대를 받았다.숙과 홀은 초대에 대한 사례로 혼돈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숙과 홀이볼 때 중앙의 혼돈은 앞뒤가 꽉 막혀 있었다.사 람에겐 7개의구멍이 있어 먹고 마시고 숨쉬는데,혼돈은 그게 없으니 구멍을 뚫어주면 무척 시원하리란 생각으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7개의구멍을 뚫은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莊子』 鷹帝王篇).
군사정권에서 문민 민주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혼돈 상태가 지금이다.혼돈속에서 까발기고 구멍을 뚫어 응징만 한다고 개혁이이뤄지지 않는다.혼돈의 복잡한 무질서속에 감춰진 질서와 법칙을발견해 현실 개혁에 응용하는게 정보화시대의 카 오스 이론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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