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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출판] 영어를 돈으로 따지면 중국어보다 10배 비싸

중앙일보

입력

서기 450년께, 영국 본토에 영어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토박이가 아니었다. 대륙에서 건너온 게르만족의 한 종족 색슨족이었다. 당시 영국의 켈트족이 북쪽 스콧족의 괴롭힘을 견디다못해 색슨족을 끌어들였는데, 이들이 그만 영국에 눌러앉았던 것이다.
근대사를 전공한 방송인인 멜빈 브래그가 쓴 『The Adventure of English』는 영어의 일대기다. 5세기부터 지금까지 영어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게르만족의 한 방언이 오늘날 지구촌 공용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개방성에 있었다. 애초부터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따위의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어휘라면 그 출생을 묻지 않았다.

영어가 겪은 최대의 시련기는 노르만족의 침공을 받은 1066년부터 약 3세기. 이 기간에 영어는 농민과 하층민의 언어로 전락하고 프랑스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던 영어가 다시 옛날의 영광을 되찾은 것은 1381년. 리처드 2세 왕이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그들의 언어인 영어로 연설했던 것이다. 15세기 후반 인쇄술의 발달로 표준영어가 자리잡았으며, 영국의 식민지 확대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영어의 위상은 이렇다. 수치로만 보면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주민이 10억명 이상으로 영어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국제 정치·경제 등에 미치는 영향력까지 고려하면 중국어는 영어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영어를 제1언어로 쓰는 사람이 약 3억8000만명. 그리고 싱가포르와 인도처럼 영어를 제2언어 혹은 제3언어로 사용하는 주민이 3억명 정도. 게다가 상거래 등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치는 엄청나다. 영어의 사용범위는 거의 전지구적이다.

언어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 대목이 재미있다. 자료의 출처는 없지만, 이 책에 따르면 중국어의 가치가 4480억 파운드이다. 러시아어가 8010억 파운드, 독일어가 1조900억 파운드, 일본어가 1조2770억 파운드로 소개된다. 반면에 영어의 가치는 무려 4조2710억 파운드로 잡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내다보는 영어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국·미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에서 사용되는 정통영어는 영어의 마이너리티로 전락하리란 전망이다.

지은이는 장래 지구촌 곳곳에서 영어가 변천해가는 모습을 싱가포르에서 확인하고 있다. 싱가포르 표준영어에는 말레이어에서 차용한 것이 많다. 게다가 복수나 과거 시제는 선택사항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What happen yesterday?’‘You go where?’‘The house sell already’‘Why you so stupid?’같은 표현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언어학자들은 한때 ‘언어의 제국’을 이뤘던 라틴어가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 등으로 갈라져 가면서 힘을 잃어갔던 사실에 주목한다. 먼훗날 영어도 단일언어가 아니라 한 언어군(群)의 모(母)언어로 남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최근 영국에서 구두점의 정확한 사용을 역설한 『Eats, Shoots & Leaves』(Lynne Truss, Profile Books)가 딱딱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6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운 것도 영어의 정확한 사용에 대한 우려에 크게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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