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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공포 탈출하기 <26>너무 헤프게 선보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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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 15면

우리말 ‘선’은 ‘사람이나 물건의 좋고 나쁨, 마땅함과 마땅하지 않음을 가리는 일’을 이른다. 본인이나 자녀의 결혼 상대자를 고르려고, 또는 함께 일할 사람을 가려 뽑으려고 만나 살펴보는 것을 ‘선본다(선을 본다)’고 한다. 이 말을 물건에 적용한 예로는 “오늘 이 좌석은 한복을 선보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박경리의 『토지』에서) 같은 게 있다.

요즘엔 가려내는 과정과 관계없이 그냥 처음 만나 보는 것도 선본다고 하는데, 특히 오늘 살펴보려는 ‘선보이다(선을 보이다)’는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쓴다. ‘선보다’에 사동(使動) 접미사 ‘이’를 붙인 것이니까 본디 ‘선을 보게 하다’지만 사동의 색깔이 엷어졌다. 그래서 ‘사물(때로는 사람)을 처음으로 공개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이다’ ‘사물을 처음으로 등장시키다’는 뜻이 지배한다. 문제는 이 말을 아무 데나 헤프게 쓴다는 점이다.
 
▶A병원은 산부인과 전문병원 시범기관 지정을 기념해 ‘세대 공감 행복 사진 공모전’을 16일까지 선보인다. : 공모전을 ‘연다’가 자연스럽다.

▶대구 수성구는 다음달 1일부터 3일까지 수성못 일원에서 ‘수성 폭염축제’를 선보인다. : 축제도 ‘한다’나 ‘연다’고 하면 그만이다.

▶코믹과 멜로·애니메이션·로맨스 등 가족과 연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최신 개봉작 10여 편이 선보인다. : ‘최신 개봉작 10여 편을 상영한다’로 구문을 바꾸면 어떨까? 새 영화도 아닌데.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데 기성 작가들이 선보인 방식과 차별성을 보이려 기울인 노력을 높이 샀다. : 기성 작가들이 ‘쓴/사용한 방식’이 낫다. 구문도 ‘인간의 희로애락을 기성 작가들과는 다르게 표현하려고’ 식으로 간명하게 고치자.

▶민물고기 전시회, 얼음조각 전시회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새롭게 선보인다. : ‘선보인다’에 ‘처음으로 공개하다’는 뜻이 있으므로 ‘새롭게’는 사족(蛇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