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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를 있게 한 세리 언니께 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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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998년 7월 7일 새벽.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열 살 꼬마 박인비는 아버지의 함성에 눈을 떴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박인비는 TV로 중계되는 US여자오픈에서 연장과 재연장 끝에 제니 추아시리폰을 꺾은 박세리의 ‘맨발의 투혼’을 봤다. 세리 언니가 양말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갈 때 보여준 하얀 발, 세리 언니가 입을 맞추던 은빛 우승 트로피도 초등학교 4학년 꼬마의 기억에 자리 잡았다.

그 어린 소녀가 정확히 10년 만에 US여자오픈 은빛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박인비는 30일(한국시간) 미국 미네소타주 메디나의 인터라켄 골프장(파73)에서 끝난 US여자오픈 최종라운드에서 2언더파 71타를 쳐 최종합계 9언더파로 우승했다. 2위 헬렌 알프레드손(스웨덴)을 4타 차로 따돌린 완승이었다.

10년 전 박세리가 그랬던 것처럼 박인비도 대회 사상 최연소 챔피언이 됐다. 98년 우승 당시 박세리는 만 20세 9개월이었는데 박인비는 19세 11개월 만에 우승했다. 여자 대회 가운데 가장 역사가 길고 권위 있는 이 대회에 박인비는 사상 첫 10대 챔피언으로 기록됐다. 박인비는 “내가 골프를 시작하게 된 것은 박세리 언니 때문이다. 그가 우승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세리 언니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세리가 우승한 뒤 이틀 만에 골프를 시작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김인경·최나연과 함께 대회를 휩쓸었다. 소질을 보이자 부모는 중학교 1학년 때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역시 골프를 하는 동생 인아는 이번 대회 예선전에 참가했지만 탈락했다.

미국에서도 박인비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열네 살이던 2002년 박인비는 미국 주니어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2006년 2부 투어를 거쳐 지난해엔 1부 투어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 우승은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술술 풀렸다. 어렵기로 유명한 이 대회에서 4라운드 내내 언더파를 친 선수는 박인비뿐이다. 선두에 2타 차 3위로 시작한 최종라운드 첫 홀에선 약 15m 거리에서 친 칩샷이 홀에 쏙 들어갔다. 2번 홀에서도 버디를 잡았다. 챔피언 조인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와 폴라 크리머(미국)가 2번 홀에서 모두 더블 보기를 하면서 무너지는 바람에 단독 선두로 뛰어올랐고 이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낙승했다.

박인비는 “나도 세리 언니처럼 어린 선수들에게 꿈을 줄 수 있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인경(하나금융)과 브라질 교포 안젤라 박이 4언더파로 공동 3위, 김미현(KTF)이 3언더파로 공동 6위에 오르는 등 한국 선수 4명이 톱10에 입상했다.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은 자신이 첫 우승을 했던 이 대회에서 멋진 끝내기를 했다. 파5인 18번 홀에서 8번 아이언으로 친 세 번째 샷이 홀에 들어가 이글을 잡고 갤러리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날 6오버파를 쳐 합계 3오버파 24위를 기록했다. 로레나 오초아(멕시코)는 5오버파 31위로 대회를 마쳤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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