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약체 정권이 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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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명박 정부는 최악의 약체 정권이 됐다. 역대 어느 정부 보다 강한 정부가 될 수 있었는데 불과 3개월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정부의 위엄도, 권위도, 힘도 탈진됐다. 대통령의 이름은 시위현장에서 놀림감이 되고 정부의 권위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시위자들은 경찰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국회는 열지도 못하고 있다. 무슨 힘으로 남은 4년9개월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까? 병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고칠 수 있다. 이미 약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고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다. 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재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약체 정부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경제를 살린다, 개혁을 한다, 이런 말들은 이제 한가한 소리가 되어 버렸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질서나 제대로 잡으라는 것이다. 정부의 최소한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모든 정부의 가장 큰 무기는 법이다. 정부는 법을 집행함으로써 힘을 가진다. 국민은 정부에 법을 집행할 힘을 위탁했다. 이 정부가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오직 법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법을 집행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졌다는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힘을 축적해 갈 수밖에 없다. 법을 시행하려면 권력자가 먼저 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래야 법을 지키라고 명령할 명분이 생긴다.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법을 초월하려 했다. “기관장의 임기와 상관없이 권력이 바뀌면 새 인사를 하는 법”이라고 초법, 탈법을 시도했다. 권력이 강하다는 오만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힘을 상실해버렸다. 늦었지만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고 함께 갈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모범을 먼저 보일 때 약체 정부지만 법을 집행할 명분과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

고립무원의 대통령에게 유일하게 남은 우군은 공무원들이다. 공무원은 법으로 대통령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다.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공무원 때리기’에 앞장섰다. 물론 일부 공무원의 안이한 태도가 나라 발전의 발목을 잡아 온 부분도 있다. 그러나 공무원은 그래도 공익을 위해 일해 온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애국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해 왔다. 자신들의 직접 상관인 대통령이 자신들을 알아 주지 않는데 이들이 뛸 힘이 나겠는가. 경찰이 시위에 이렇게 무력한 것도 사실은 대통령 탓이다. 범인을 못 잡는다고 대통령이 경찰서를 직접 찾아가고, 시위 여대생을 방패로 때렸다고 징계를 하니 경찰이 눈치만 보는 것 아닌가. 경찰 수뇌에게 권한을 주고 시위를 막으라고 분명한 지시와 격려를 해준 적이 있는가. 지난 10년간 정부의 공안 부서는 무너졌다. 공안 부서는 공공의 안전을 지키는 곳이며, 공공의 안전은 모든 국사의 출발점이다. 지금이라도 공안 부서 공무원들을 격려해 보라. 국가의 수장답게 공무원들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보라.

약한 사람에게는 우군이 되어줄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3개월간 특징은 ‘배제’였다. 당에서도, 권력 중심부에서도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배제시키는 데 혈안이 됐었다. 권력을 독식하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측근끼리 공개적으로 물고뜯는 추태를 벌이고 있다. 약체가 된 이 마당에 더 이상 배제는 안 된다. 공존하면서 갈 수밖에 없다. 박근혜든 이회창이든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라. 민주당 인사들까지도 함께 손잡고 가야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공존과 관용이며 다원주의다. 약할수록 민주 원칙에 더 충실해야 강해지는 것이다.

약체 정부는 약체답게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승리자의 철학이었다. 평생 성공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내 방식이 옳으니 나를 따르라고 오만을 부렸다. 그러나 이제는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서야 패배를 하다니…. 아이러니다. 사람은 패배를 알아야 겸손해질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게 된다. 그때서야 일반 국민들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실용철학도 바뀌어야 한다. 그때그때 상황 논리에 따르겠다는 말인데 지금의 혼란은 바로 이러한 눈치보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음은 열되 기회주의가 돼서는 안 된다. 기회주의는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민주주의는 기회주의가 아니다. 약체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살아 남는다. 그 원칙이 무엇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나라를 혼란으로부터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의무만이라도 붙잡으라. 민심이 돌아오고 힘이 붙을 것이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