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순구 순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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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 35면

강정일당(1772~1832)은 아이를 9명이나 낳았지만 한 명도 키우지 못했다. 모두 어려서 죽었는데, 아마도 영양실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남편 윤광연은 부인 강정일당에 대한 제문(祭文)에서 “9남매를 낳아 하나도 기르지 못하였으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고, 3주야를 굶었으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썼다.

자식 아홉을 잃은 엄마의 태도가 이럴 수 있는가. 강정일당은 그 의식세계가 어떠했기에 이렇게 담담할 수 있었을까. 강정일당은 근 10년 내에 주목받기 시작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학자다.

강정일당은 남편과 쪽지 편지[尺讀]를 주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안채와 사랑채에 있으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이 꽤 로맨틱하게 들리지만 기실 편지 내용은 그렇게 달콤하지만은 않다.

“저는 일개 부인으로서 몸은 집안에 갇혀 있고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으나, 그래도 바느질하고 청소하는 여가에 옛 경서와 고전들을 읽으면서 그 이치를 궁구하고 옛 사람들의 행실을 본받아 선현들의 경지에 이르고자 합니다.

하물며 당신은 대장부로서 뜻을 세워 학문을 하면서 스승을 모시고 좋은 벗들과 사귀고 있으니, 무엇을 강론하든지 해명하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실천하든지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인의(仁義)를 실천하여 온당하고 바르게 마음을 세워서 성현을 배운다면 누가 그것을 제지하겠습니까? 성현도 대장부이며 당신도 대장부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바라옵건대,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하고 반드시 성현이 되기를 기약하소서!”

요지는 공부 열심히 해서 당시 사회의 목표인 성인(聖人)이 돼보라는 것이다. 압력성 글이다. 정일당 쪽에서 남편에게 보낸 46편의 쪽지 편지는 대개 이렇게 남편에 대한 채근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신은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학문을 하는데, 남자가 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남편 윤광연은 이것이 싫지 않았나 보다. 후에 이 글들을 모두 모아서 정일당의 문집을 만들어 줬으니 말이다. 정일당은 조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문집을 지닌 여성이 됐다. 윤광연이 부인의 잔소리를 싫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그런 요구가 너무도 보편적인 트렌드였기 때문이리라. 도덕이라는 주제에 올인하는 것 말이다. 거의 종교가 돼버린 신념으로 아이가 죽어도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도덕을 실천하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쇠고기 추가협상에서 미국 측에 6월 10일 촛불시위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을 봐라. 과학으로 설명될 사진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였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신념을 갈고 닦는 데 아주 익숙하다. 그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양날의 칼이 있다. 신념은 아주 유용할 수도 또 아주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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