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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家] 화가 박태후의 나주 죽설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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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수장을 하라고 할 거예요, 나무 수(樹)자 수장. 몸을 땅에 묻고 그 위에 은행나무를 한 그루 심는 거지요" 숲길을 걸으면서 죽설헌 주인이 말했다. "하필 왜 은행나무를?" 내가 물었다. "오래 살거든요. 수형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데다 낙엽질 때 빛깔이 찬란하고 열매까지 열리니까…."

나주 죽설헌은 먹으로 그림 그리는 시원(枾園) 박태후의 집이다. 주변이 배밭이라 집이 배나무에 둘러싸였고 탱자나무와 꽝꽝나무.차나무로 울타리를 둘렀다. 동쪽으로 우거진 대숲을 거느렸으며 집 뒤란으로 은행. 매화.감.동백 같은 꽃피고 열매맺는 나무 수십그루가 우거져 있다.

죽설헌의 나무들은 올해 쉰인 주인이 나주 원예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스무 살에 심은 것들이다. 그새 대나무는 숲을 이루었고 매화는 고목이 되었으며 탱자나무는 맹렬하게 서로 가시를 얽어 호랑이도 타넘지 못할 울타리로 변했고 은행은 한 그루에 족히 서너말을 딸 정도의 거목으로 자랐다. 30년은 묘목이 숲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살았다. 졸업 후 첫 직장이 광주고등법원 정원사였고 군 제대 후엔 농촌지도소에서 20년을 근무했다. 틈틈이 야간대학을 다니며 어릴 적 소원대로 대(竹)와 난 치는 법을 배웠고 먹 다루는 방식을 익혔다. 그리고 바로 이곳 나주시 금천면 춘곡2구, 밭뙈기 둘뿐이던 아버지의 땅을 조금씩 늘려가며 나무를 심어나갔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단풍나무 종자를, 나주 불회사에서 호두와 산벚나무 종자를, 해남 대흥사에서 동백과 비자나무 종자를 옮겨왔다. 3천평. 300여 그루의 나무. 제 손으로 이룬 대숲, 근속 20년이 되어 공무원 연금을 받을 자격이 생기자 그는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림에만 전념했다. 그새 1982년 전남미전과 85년 국전, 90년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줄줄이 입상경력을 쌓았으며 여러 차례의 개인전으로 열성 팬을 수두룩하게 거느린 주목받는 화가가 되었다.

"처음엔 줄기차게 대 그림만 그렸어요. 다른 누구 아닌 박태후의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공모전에 당선된 그림도 모두 대 그림이죠. 집은 85년에 지었는데 그래서 당호도 죽설헌이고."

이렇게 오지고 통쾌한 삶이 또 있을까. 나는 사람으로 그중 잘사는 방법이 나무를 심는 것인 줄을 죽설헌에서 재확인했고 인생의 해답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평생 매달리는 것에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죽설헌은 주인이 30년간 공들여 만든 낙원이다. 그는 죽설헌 앞뜰에 길쭉한 연못을 파두고 거기 수련을 심었다. 연꽃이 피고 연근이 자라고 연밥이 익도록. 연못 물을 끌어올려 집 뒤란을 한바퀴 돌아 흐르는 물길을 만들었다. 죽설헌 유일의 인공적 요소지만 억지가 겉에 드러나지 않으니 거슬리지 않는다. 커녕 깊은 산사에 온 듯 하루종일 졸졸대는 물소리가 들린다. 물소리도 분명 소리건만 세상 잡답을 말갛게 씻어주고 집의 고요를 아연 깊게 만드니 희한한 일이다. 대숲은 바람소리를 증폭하는 파워 앰프이고 댓잎은 주변 공기를 빗질해 잠깐만에 소슬하고 향기롭게 업그레이드 한다.

그리고 새들. 죽설헌 일대는 멧새들의 천국이다. 시끄러울 정도로 온갖 새가 찾아와 제각기의 소리로 지저귄다. "내가 일부러 불러모았습니다. 새 모으는 방법요? 간단합니다. 열매 많은 나무를 심고 나무에 약을 치지 않는 거지요"

그는 뒤뜰에도 연못을 파고 거기다는 빙 둘러가며 노랑 창포를 심었다. 붓꽃 피는 계절에 물에 어리는 노랑 빛을 즐기려는 의도일 것이다. 동백나무 아래는 사철 푸른 맥문동을 심어 떨어진 동백꽃이 더 붉어보일 장치를 만들었고 집 어귀에는 겨울에도 꽃 피는 은목서를 심었다. "은목서가 지면 동목서가, 동목서가 지면 금목서가 차례로 피어요. 겨울에도 꽃향기가 끊이질 않지요"

봄이면 집 입구 고샅길에 좁쌀만한 보랏빛 야생화가 융단처럼 좍 깔리고 창문 앞엔 아랫녘에만 자란다는 송악이란 넝쿨식물과 담쟁이와 능소화가 계절따라 황홀하게 벽을 휘감아 오르도록 만들어놨다.

입구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기왓길이 만들어져 있다. "돌담을 쌓고 싶었는데 이 고장에 돌이 귀해서요." 대신 고가를 뜯어낼 때 나온 기왓장을 모았다. 10여채 분량을 공들여 모아 길 양쪽으로 포개 쌓았다. 알맞게 휘어진 그 기왓길을 따라가면 죽설헌이 나오고 대숲 뒤편까지 이어진다.

집은 나지막하게 대숲 아래 엎드린 듯 지었다. 설계도 시공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형태는 커다란 니은자다. 한편이 마루방 세 개로 길쭉하고 시원하게 연결돼 있다. 거실과 화실과 옷방. 나뭇결이 또렷하고 목질이 아름다운 마룻바닥을 만져본다. "마루, 좋지요? 폐교를 헐어낼 때 교실 바닥 했던 나무를 싣고 왔어요. 촉감과 빛깔이 두루 최상입니다."

방 하나는 구들장을 놓아 나무 때는 아궁이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그림의 소재 또한 자신이 만들고 기른 것들에서만 골라온다. 직접 심은 대와 일부러 불러모은 새와 손수 접붙여 기른 감나무 열매를 깎아 만든 홍시와 흐르는 물, 그것들을 화폭 위에 호방하고 따스하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옮겨놓는다. 특히 그의 참새 그림은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돈다. 긴 전깃줄에 조르륵 올라앉은 각양각색의 참새들, 창문 위에 가로로 걸린 그 그림을 보고 나는 얼핏 실제 새가 거기 날아와 앉아 있는 줄로 착각했었다. 극사실화가 아닌데도 그랬다.

낙원의 마지막 요소인 사랑. 그는 아내 김춘란과 동갑이다. 군에 있을 때 펜팔로 사귀었다. "친구놈이 주소 둘을 주면서 답장이 잘 안올 것 같다고 한 쪽을 짚었는데 그게 이 사람이었죠."

20년 남짓 함께 살고 난 둘은 이제 오누이처럼 닮았다. 헤어 스타일도 똑같다. 환한 이마를 드러내고 올백으로 머리칼을 넘겨 뒤통수에 꽁지머리로 묶었다. 남편은 반백, 아내는 검정, 머리카락 빛깔만이 다르다. 둘 사이엔 딸이 둘 있다. 둘 다 아버지를 이어 그림 공부를 하는 중이다. 나무를 심고 야생화를 가꾸고 곡식과 열매를 갈무리하면서 네 식구의 의견이 어긋나는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들의 교과서가 있거든요.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죽설헌에서 차 대접을 받았다. 마당에서 딴 차를 안주인이 손수 덖은 것이라 했다. 찻잔 곁에는 손으로 빚은 세 개의 보시기에 빛깔이 서로 다른 삶은 콩이 소복이 담겨 있고 껍질째 금방 쪄낸 토란 한 접시도 따라나왔다. 맑고 구수하고 담백했다. '감자를 먹으려 한다면 튀기거나 으깨려고 소란스럽게 애쓸 것이 없다. 튀기거나 으깨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감자를 씻어 껍질째 구우면(삶으면) 된다. 그냥 구워도 좋고 버터와 소금을 가미해도 좋다. 그보다 더 간단하고 맛좋은 식사가 있을까?' 헬렌 니어링의 이런 힘찬 질문을 염두에 둔 찻상임이 분명했다.

목포에서 2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나주 배박물관 건너편, 춘곡 2구 팻말을 찾으면 죽설헌이란 낙원에 입장할 수 있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psyche325@hanmail.net>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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