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학계에서 표절 기준을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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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근 논문 표절에 대한 기사를 거의 매일 접하다 보니 ‘논문 표절’이란 말은 학문을 업으로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2005년부터 ‘연구 윤리’란 용어에 대해 누구나 한마디할 수 있는 것처럼 ‘논문 표절’ 역시 일반적인 어휘가 되었다. 남의 연구를 인용없이 도용하는 것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것인가를 문제시하는 분위기 조성에는 성공한 듯싶다.

그러나 실제 문제가 되고 학계에서 논의가 필요한 것은 타인의 자료를 도용하는 일반 표절 행위보다는 자기표절이란 본인 자료 중복 사용의 부정행위다. 자기표절에 대하여 캐나다의 폴 브라이언 교수는 “자기표절은 저자가 독자에게 신간이 발간된 양 속이는 사기행위와 같은 것이며, 중고차를 신차라고 주장하며 매매하려는 행위”라고 비유했다.

현재 많은 국내 대학 및 연구소의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규정 및 연구지침에는 ‘타인의 아이디어, 연구 내용·결과 등을 정당한 승인 또는 인용없이 도용하는 표절 행위’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단지 세 곳의 대학교만이 자기표절(이중·중복 게재)을 언급하고 있다.

대다수 대학교의 규정은 2006∼07년 제정되었으며 과학기술부 훈령 제236호를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훈령 제236호 제4조에 자기표절 관련 내용이 없어 여러 기관의 규정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 이 점에 대해서 논의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자기표절이 학자들에서 알려진 것은 오래 전이 아니다. 이 용어 자체도 아직 학계에서 정립되지 않은 상태로 중복 출판, 이중 게재 또는 자기표절로 출판 부정행위의 하나쯤으로 이해된다. 150개국 35만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전기전자공학 전문가들의 국제조직(IEEE)의 학술단체에서도 2002년에서야 본인의 글을 재사용하는 행위를 표절로 정의하며 ‘자기표절은 용인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특히 자기표절의 제보가 있을 때 ‘어디까지를 부정행위로 보는가’의 문제로 각 학회들이 고심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한 분야만 일하는 사람이 논문을 작성하다 보면 이미 출판된 문장을 재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2005년 과학전문잡지인 ‘네이처’에서도 이 점에 대해 ‘어떤 학술지에서는 문장 재사용의 최대 한계를 30%로 설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자기표절의 범위는 시간을 갖고 학문 특성에 따라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매스컴에 논문표절이란 기사가 나오면 ‘왜, 어떤 근거에서, 표절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혹자는 정부 차원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그것에 따라 주의하고 판정하면 되지 않겠나 하지만 이것은 매우 비효과적이며 위험한 예방법이다. 2007년 학술진흥재단(학진) 주관으로 인문사화과학 분야의 표절 가이드라인의 연구보고서가 나왔으나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한 문장에서 6단어 이상의 연쇄표현을 표절로 정의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6단어 이하의 경우에도 표절로 판명된 사례가 있다. 또한 각 학술지는 출판윤리강령 또는 규정이 있어서 학문 특성에 따라 표절의 위반 시 판정의 단계를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공계 관련 학문에서는 표절 가이드라인을 기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저명한 미국의학편집자협회의 가이드라인조차 실제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실제로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수학자·이론물리학자들이 관여하는 학술지에서 저자의 순서는 알파벳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학문세계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 제정보다는 실제 관련 학자들이 학문의 특성을 고려, 학자의 양심에서 비롯된 합의 결과물을 찾도록 유사 전공 분야의 여러 학회들이 모여 표절 정의 및 처벌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다.

김형순 인하대·신소재공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