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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 <17> 권원태의 안동 퇴계 오솔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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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산딸기 따먹으며 걷는 옛길

백운지교에서 미천장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까지는 시멘트로 포장돼 걷기는 편하나 운치가 덜하다. 하지만 전망대를 겸한 고갯마루에 서면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낙동강이 두루마리 산수화를 펼쳐놓은 것처럼 장관을 연출한다. 퇴계는 이 아름다움을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는 시로 풀어냈다.

‘굽이굽이 맑은 여울 건너고 또 건너니 /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 맑은 여울 높은 산이 숨었다가 나타나니 / 끝없이 변한 자태 시심을 돋워주네’.

고갯마루에서 농암종택을 잇는 3㎞ 길이의 강변길은 전형적인 오솔길이다. 수풀을 헤치고 고갯길을 내려서면 폐가를 방불케 하는 허름한 가옥 몇 채가 짙은 녹음 속에서 나그네를 맞는다. 길섶에 뿌리를 내린 뽕나무는 가지에 까맣게 익은 오디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새콤달콤한 맛의 오디 몇 알에 금세 동심으로 돌아간다. 어린 퇴계도 오디를 따먹으며 걸었을까?

퇴계의 시심을 불러일으킨 낙동강 상류의 절경은 지명처럼 유난히 흙과 돌이 붉은 단천(丹川)에서 농암종택 사이에 숨어 있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원시의 낙동강은 시냇물로 흐르다 청량산을 만나면서 강폭을 넓힌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말했다.

퇴계 오솔길은 시야가 확 트인 강변을 만나자 외줄처럼 일직선이 된다. 강변은 둥글둥글한 돌로 뒤덮인 자갈밭.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에 닳고닳은 탓이다.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퇴계도 아마 이쯤에서 땀을 식히기 위해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갔으리라.

강변을 벗어나자 오솔길이 산을 오른다. 인적 드문 탓인지 산속은 온통 산딸기 밭이다. 달착지근한 산딸기 맛에 홀려 수풀을 이리저리 헤매다 강변에 우뚝 솟은 잘생긴 바위 하나를 만났다. 퇴계가 ‘경암(景巖)’이라고 부르며 시 한 수를 선물했던 바위다.

‘부딪는 물 천 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 / 중류에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 / 인생의 발자취란 허수아비 같은지라 /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다리 세워 버텨보리’.

경암을 지나니 곧이어 한속담(寒粟潭)이다. S자로 휘도는 낙동강이 흐름을 멈춘 듯 담을 이룬 곳이다. 상류 쪽으로 기암절벽과 농암종택, 그리고 멀리 산안개 피어 오르는 청량산 자락이 펼쳐진다. 말을 타고 오솔길을 걷던 퇴계는 절경에 반해 다시 또 시 한 수를 남겼다.

‘벌벌 떠는 여윈 말로 푸른 뫼를 넘어가서 / 깊은 골짝 굽어보니 찬 기운이 으시으시 / 한 걸음 두 걸음 갈수록 선경이라 / 기괴한 돌 긴 소나무 시냇가에 널렸구료’.

바위·협곡에 취해 시심이 절로

한속담 상류의 수직절벽은 학소대(鶴巢臺). 천연기념물인 먹황새[烏<9E1B>·오관]가 서식하던 곳으로 절벽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제72호 오관 번식지’라는 표석이 잡초 속에 묻혀 있다(보존가치 상실해 지정 해제). 먹황새 대신 왜가리 한 마리가 학소대 주위에서 원을 그린다.

뽕나무 두 그루가 한 몸이 된 남녀를 연상하게 하는 연인나무를 지나면 미루나무 사이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보인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의 가송리로 올미재 아래에 둥지를 튼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종택이다. 농암은 퇴계의 숙부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이로 퇴계는 농암의 아들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

농암종택은 1975년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농암종택 앞의 절벽은 벽력암이다. 태백에서 떠내려 온 뗏목들이 절벽에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냈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퇴계가 걷던 길은 농암종택에서 아스팔트길을 따라 청량산까지 이어지지만 오솔길은 아쉽게도 이곳에서 막을 내린다. 어린 시절 청량산으로 공부하러 가던 길에 낙동강 상류의 선경에 취했던 퇴계는 예순네 살까지 이 길을 대여섯 번 더 왕래하며 바위와 소, 협곡, 단애를 주제로 수십 편의 시를 남겼다. 사서삼경을 옆구리에 낀 어린 퇴계와 말을 탄 늙은 퇴계가 수풀 속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퇴계 오솔길. 외줄처럼 가늘고 긴 이 길은 묵향 그윽한 산수화를 닮았다.



Tip

■안동에서 봉화 방향으로 35번 국도를 타고 도산서원을 거쳐 퇴계 종택까지 간다. 퇴계 종택에서 퇴계 묘소까지 약 1.5㎞. 묘소를 지나자마자 왕모산성 방향으로 좌회전해 1㎞쯤 달리면 이육사 생가 터와 이육사기념관이 나오고 이어 퇴계 오솔길의 시작점인 백운지교가 나온다.

■퇴계 오솔길에 위치한 가송리의 농암종택(054-843-1202)은 농암 이현보의 유적지를 이전, 복원한 곳으로 사랑채·긍구당·명농당 등에서 숙박할 수 있다. 요금은 방 크기에 따라 4만∼10만원. 지례예술촌(054-822-2590), 오천군자마을(054-859-0825), 임청각(054-853-3455), 하회마을(054-853-0109), 수애당(054-822-6661) 등 안동 전역에 숙박이 가능한 종택과 고택이 많다.

■안동의 음식은 청빈한 선비의 밥상처럼 담백하고 검소하다. 대표 음식인 헛제삿밥은 각종 나물에 상어고기 등 어물, 육류를 끼운 산적, 탕이 곁들여진다. 안동민속촌 옆에 위치한 까치구멍집(054-821-1056)은 헛제삿밥이 6000원, 안동식혜 등을 추가한 양반상이 1만원이다. 이 외에 안동간고등어, 안동찜닭, 건진국수 등이 유명하다. 안동시 문화관광과 054-840-6393.


■권원태씨는=1967년 부산 출생. 열 살 때 줄타기를 시작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안성시립바우덕이풍물단 상임단원. 영화 ‘왕의 남자’에 대역으로 출연했고, 드라마 ‘황진이’ 줄타기를 지도했다. 프랑스 콩폴랑 축제, 아테네 올림픽, 독일 슈투트가르트 CMT박람회 등에서 줄타기 공연을 선보였다.


공동 캠페인 : 중앙일보·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Korea Spark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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