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원자재 더 싸게 살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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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 시스템 덕분에 지난 40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런데 수출에만 신경을 집중한 탓에 수입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수입 기법을 잘 구사하면 수출 못지않은 국부(國富)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수출로 100원을 벌어들이거나 수입을 잘해 100원 아끼면 우리 손에 떨어지는 돈은 똑같은 100원이다.

우리가 수출에 주력하면서 수입의 중요성을 까맣게 잊고 있는 동안 일본은 일찌감치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일본은 심각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1947년부터 종합상사를 앞세워 미국의 곡창지대와 곡물수출기지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미 시카고선물거래소 회원으로 참여해 안정적으로 곡물을 수입할 수 있는 체제도 구축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요즘 일본은 전 세계 곡물 물동량의 상당 부분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비철금속과 에너지, 각종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발전 모델을 뒤쫓아온 중국이지만 원자재 수급 기법은 우리보다 훨씬 앞섰다. 그들은 자원 부국들과 깊은 유대를 맺는 데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아프리카까지 날아갈 정도로 자원외교에 열심이다. 그 결과 중국은 아프리카와 중동·남미 국가들로부터 대규모 물량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 반면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는 아직도 뚜렷한 계획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 같은 국가와 자원쟁탈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우선 국가적 차원에서 자원 부국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데 외교력을 집중해야 한다. 입으로만 유대관계를 외칠 게 아니라 이들 지역의 후생복지시설과 사회 인프라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한국과 상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이러한 기반이 확보돼야만 원자재 실수요자들인 국내 기업들이 자원확보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수 있다. 기업들이 원자재 현물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안정적인 가격을 확보하는 것이다. 즉 들쭉날쭉한 가격으로 원자재를 사면 기업이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세우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원자재를 기업이 원하는 가격에 확보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상품 선물과 옵션시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주가지수 선물·옵션 시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장이지만 상품 선물·옵션 시장은 왠지 문턱이 높아 보인다. 경험자를 찾는 것도 극히 어렵다. 그동안 우리가 상품 선물·옵션 전문가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 중요 원자재들은 모두 선물 및 옵션시장을 통해 그 가격이 형성되고 있다. 따라서 안정적인 자원확보를 위해선 반드시 상품 선물·옵션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원유나 천연가스는 물론 구리·알루미늄·금·은 같은 비철금속류와 옥수수·콩·소맥·쌀 등의 곡물은 국제적으로 상품 선물·옵션 시장을 통해 그 가격이 미리 결정된다. 돼지 삼겹살과 도축육 같은 육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꼭 수입해 와야 할 원자재 대부분이 선물·옵션 시장에서 이미 가격이 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시장들의 수급현황을 수시로 분석하고 그에 걸맞은 수급전략을 제시해줄 수 있는 전문가, 각 상품별 전문딜러가 필요하다. 그래야 알뜰하게 안정적으로 원자재 확보가 가능해진다. 주식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이미 코스피 옵션을 통해 전 세계 최대의 옵션시장으로 떠올랐다.

그 덕분에 옵션 및 선물 거래자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상품 현물시장과 연계해 시황을 분석하고 적정한 가격에 현물을 확보할 수 있는 진정한 딜러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만약 한국에 뛰어난 상품 선물·옵션 전문가들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애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올해 초에 옥수수나 구리 선물에 헤징만 했다면 이들 원자재를 지금보다 25% 이상 싸게 살 수 있었다.

최진욱 미국 드폴대·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