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제 많은 올 논술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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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올해 대학입시에서 논술시험은 다른 어떤 시험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내년 부터는 사실상 논술 한 과목으로 본고사가 치러지기 때문에 논술이 앞으로 대입에서 합격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이런 상황에서 올해 대 학입학 논술시험은 앞으로 출제될 출제경향이나 형식의 전형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각 대학에서도 출제교수를 엄선하는 등 이번 논술문제 출제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대학당국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출제된 논술논제들중일부는 무엇을 묻고자 하는 문제인지 불분명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이번 시험이 앞으로 많은 수험생과 학생들의 학습방향을 결정한다고 본다면 이같은 불명료한 문제가 미칠 파장 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지금까지 고등학생은 물론 교사들도 논술시험에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논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놓아왔던 것이 고교 교육의 현실이었다.그러나 이런 결과를 고교 교사와 수험생의 책임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대학입학 시험이 고교교육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우선 대학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작년.재작년 출제된 논술논제는 차치하고라도 올해 출제된 논제를 살펴보면 출제교수 자신도 논술에대한 정확한 이해를 지니고 있지 못 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때문이다.
논술에 대해 가장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논술을 「작문」과목으로 생각하는 듯한 대목이다.물론 그 배경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본고사 과목을 세과목으로 제한한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대학에서는 편의상 논술을 국어과목에 포함시켜 왔고, 이것이 논술을 「작문」과목으로 오해하게 했다.대학 출제교수들도 이러한 오해 때문에 지난해에는 논술이라기보다 사실상 작문문제를 출제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95년도 출제된 서울대 논제 역시 이런 이유로 교수회의에서 심각하게 이의가 제기 됐다.체험이나 주관적 삶의 태도를 묻는 작문 문제로서는 지식이나 사유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주요한 이의제기였다.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서울대가 올해부터 논술I과 Ⅱ를 분리하게 됐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논술이 「종합적 지식」을 측정하는 하나의 시험형식이라는 점이다.지식 없는 글쓰기 요령이나 학생들의 궤변혹은 출제자의 주관적 의도를 짐작하는 눈치를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다.논술은 자신의 주장을 객관적 지식에 바탕을 두 고 얼마나 설득력있게 논변할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만약 논술이 이같은 객관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출제되지 않는다면 그 답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을 마련하기가 어렵다.바로 이러한 이유로 지난해 서울에 소재하는 어느 사립대 학에서는 2명의 교수가 채점한 결과 점수편차가 워낙 심해 다섯번에 걸쳐 채점했던일까지 있었다.
올해의 대입 논제들중에서도 어떤 경우에는 도대체 무엇을 묻는문제인지 불명료한 문제가 적지 않다.주어진 지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출제자 이외에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논술시험은 출제자의 주관적 의도를 파악하는 시 험이나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한 시험이 아니다.출제자가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견해를 학생들이 파악하기 바란다면 그것은 논술의 목적과도맞는 것이 아님은 물론 일종의 폭력이다.
이런 논제에 대해 과연 대학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우려된다.논술이란 학생 개인의 주장을 묻는 것이되,그 주장을 객관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을 묻는시험이다.그럴 때에만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고,학 생들도 이론적학습을 통해 논술에 대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대학이 고교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어렵게 정착한 논술이 고교 교육의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대학당국의 보다 신중한 출제가 요망된다. (본사 전문기자.철학박사) 김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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