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의 을해년-삼풍.비자금 고난의 한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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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을해년 한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패배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노태우(盧泰愚)씨 비자금사건과 5.18특별법 수용에 이르기까지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초대형 사건 사고 속을 숨가쁘게 헤쳐나와야 했다.이 와중에 연초 국 정목표로 내세웠던 「세계화」정책도 힘을 잃었다.
金대통령에게 첫 시련은 30여년만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였다.선거혁명의 기치아래 유례없이 깨끗한 선거를 치러냈지만 선거결과는 이런 공적을 평가받기엔 역부족이었다.취임후 정치자금 한푼 받지 않고 칼국수를 먹어가며 국정에 몰두한 대가 치고는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여권 핵심부를 사로잡았다.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두 金씨의 지역할거정치 탓이라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金대통령은 세대교체 바람으로 지역분할구도를 깨기 위해 40대 장관을 임명하는가 하면 집권당에 40대 사무총장을 기용하는 파격을 연출했다.두金씨를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선거패배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등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8.15대사면과 정부수립후 최대규모의 일반사면을단행하는등 구여권(舊與圈) 끌어안기 내지는 보수회귀 기미를 보이던 金대통령은 10월중순 터진 盧씨 비자금사건을 계기 로 과거와의 본격적인 단절로 돌아섰다.
盧씨 구속에 이어 金대통령은 5.18특별법 제정을 수용했다.
『평가는 역사에 맡기자』며 12.12와 5.17 관계자들에 대한 사법처리에 반대의사를 밝혔던 金대통령은 『역사와 대화하는 자세로 국정에 임한다』면서 「역사 바로세우기」 작 업에 착수한다고 선언했다.
「제2건국」「명예혁명」「창조적 대업」등의 다소 격한 단어들이동원됐다.
金대통령으로서는 3당합당의 주역이었던 盧씨의 거액 비자금사건에 직면해 6공과의 단절과 차별성 부각 외의 탈출구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92년 대선에서의 지역적.계층적 지지기반을 상당부분 상실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盧씨 비자금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도 金대통령이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을지는 회의적이다.
여권 핵심부의 이론공급을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기득권 계층은 등을 돌렸고 새로운 지지계층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고 현재 여권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년 4월 총선에서의 결과는 金대통령 실험의 성공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지렛대다.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지역구도가 총선을 판가름하기 쉽다.金대통령은 연말연시 휴가를 그다지 밝은 마음으로 보낼 것 같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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