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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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농장과 목장은 모두 아리영 명의로 되어 있다.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외가 재산이다.이혼하면서 이것을 나눴다.농장과 농장집은아리영 소유로,목장과 연구소.산장은 남편의 것으로 했다.다만 농장의 관리까지 남편에게 위임하고 농장과 목장에 서 얻어지는 이익을 반분(半分)하기로 정했다.
아무 것도 필요없다며 남편은 보따리를 쌌으나 사정하다시피 주저앉혀 결말을 봤다.
춘천가정법원에 가서 협의이혼을 마무리지었다.이것으로 13년의결혼생활이 끝난 것이다.후련하면서도 허무했다.13년이란 세월은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아버지가 일러준 세네카의 말이 생각났다. 『인생은 잘 쓰기만 하면 큰 일을 이룩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긴 것이지만 시간을 헛쓰는 자에겐 아주 짧은 것이다.』 지난 13년이 바로 어제인듯 여겨지는 것은 시간을 헛되이 보낸 까닭인가.
『몸 성히 잘 지내요.』 『당신도요….』 이것이 작별인사의 전부였다.남편은 농장으로 내려가고 아리영은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이 집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비로소 홍수처럼 불어나는 고독을 느꼈다.불빛이 켜지지 아니한 빈집에 홀로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처량한지 뼈 속속들이 아프게 실감했다.
현관 문을 따는 열쇠의 차가운 소리가 심장 도려내는 칼날 부딪치는 소리같다.
우변호사가 보고 싶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
그의 육신이 그립다.못견디게 그립다.
마당에서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벌써 가을이 오고 있는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코펜하겐에서는 이렇게 지냈다.그 감미로운 자유,자유로운 수줍음을 재생하고 싶었다.
경대 앞에 앉아 클렌징 크림을 발라 화장을 지웠다.13년의 가면을 지우듯 몇번이나 휴지로 닦고 또 닦았다.
화장 지운 얼굴이 더 맑아보였다.몸빛과 같은 반투명의 발그레함이 거울 안에서 생기를 띠었다.육신이 타고 있는 것이다.냉수샤워라도 하면 이 번뇌의 불을 끌 수 있을까.
목욕하고 나온 아리영을 탁자에 눕혀 다가선 우변호사 생각이 났다.그는 아리영의 은밀한 곳을 칭송했었다.
『영녀(영女)! 이름 그대로 소녀같애요.』 「영녀」란 대전정선(大前庭腺)의 한명(漢名)이라 했다.의학명에 비겨 한결 운치있고 에로틱한 이름이 아닌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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