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되풀이되는 愚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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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역사적으로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우행(愚行)이 되풀이된다. 개도 한번 몽둥이를 맞은 골목으론 안 간다는데 사람은 겁도 없이 계속해서 간다. 조금씩 형태도 다르고 그럴 사정도 있지만 그 끈질긴 어리석음의 반복엔 차라리 질리게 된다. 너무 좋을 대로 해석하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로또 대박이 터질 확률이 자동차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작지만 누구나 반대로 생각한다. 자동차에 치여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 하는 대신 혹시 복권은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는 것이다. 과거 큰 선거만 한번 치르면 온 나라가 집단최면 상태에 빠져 우행을 저질렀다. 그 후유증이 엄청났다. 그러면서도 이번만은 다르겠지 하고 매번 기대한다.

*** 온 나라가 집단 최면상태 빠져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저지른 우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바깥세상 돌아가는데 눈을 감았고 이성이나 법보다 감정과 떼가 앞서는 분위기였다. 나라일 치고 무엇 하나 되는 게 없었다. 국민기업 기아자동차를 살려야 한다는 데모 행렬이 거리를 메웠고 금융개혁은 표류를 거듭했다. 정치권은 첨예한 이해대립을 조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했다. 눈앞의 득표계산 때문이다. 그리곤 다투어 선심공약을 쏟아냈다. 나라야 어찌 되건 여야 보스는 자존심 싸움만 했다. 그 결과 IMF 사태를 맞고 만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그 뒤 왜 그런 사태가 됐는지, 정말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하는 것은 희생양 몇 사람 만든 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히려 피고석에 서야 할 사람들이 더 펄펄 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실패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것이 가장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동남아에 통화파동이 벌어졌는데 우리는 무관심했고 낮은 환율을 억지로 끌고 갔다. 97년 가을쯤 대미 환율이라도 1000대 이상으로 과감하게 끌어 올렸으면 그토록 벼랑에 몰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도 그런 생각을 못 한 게 아니라 그 엄청난 일을 할 엄두를 못냈다. 국정 리더십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IMF 사태의 코스트는 매우 컸다. 정부 빚이 크게 늘었고 알짜기업들을 많이 팔아먹었다. 한번 더 그런 사태가 닥치면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 쓴 경험도 잊은 듯 지난 총선 땐 또 무리를 했다. 부동산 경기를 부추기고 카드 사용과 가계 대출을 부채질했다. 그때도 상환능력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이번은 옛날과 다르다고 했다. 경기가 좋아지면 빚 갚는 것은 문제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심각한 가계 부실과 신용불량자 사태다. 그 우행의 계산서는 두고두고 갚아야 할 것이다.

눈앞에 총선을 앞둔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바깥 세상에 무관심하고 집안싸움에 결사적이다. 기름값이 오르고 원자재 파동이 심각하며 중국의 위협이 급박하다. 그런데도 여러 무리가 재연되고 있고 중요한 나랏일이 지지부진하다. 97년과는 정반대로 환율을 높게 방어한다고 큰 고생을 하고 있다. 인기선심 경쟁도 여전하다. 정부예산도 손 크게 쓰고 있고, 자비로운 신불자(信不者) 대책도 나왔다. 돈이 얼마나 들지 모르는 수도 이전 대역사에 여야가 합의했다. 선거를 앞두고 표 계산만 하는 것이나 자존심과 오기 대결은 옛날과 꼭 같다. 법 경시와 떼쓰는 풍조는 더 하다. IMF 전에 국제수지와 외화유동성을 안 챙긴 것이 큰 탈을 빚었는데 지금은 심각한 투자부진과 산업공동화에 무관심하다. 앞으로 먹고 살 일이 걱정인데 온 나라가 선거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더욱이나 탄핵 사태로 국정 리더십이 큰 상처를 받았다. IMF 사태도 어름어름하다 맞고 말았는데 이번에도 그럴 위험이 충분히 있다. 바깥 사정을 잘 살펴 결단을 내리고 그쪽으로 국력을 모으는 일이 정말 급하다.

*** 이번엔 더 오래 고생할 수도

지난번엔 급성 간염 정도로 지나갔지만 이번엔 간경변이나 간암 같이 오래갈지 모른다. 일본은 근 10년을 고생했다. 그러나 모두들 태평스럽다. 경제에 있어 중앙선을 넘나드는 곡예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교통사고는 걱정하지 않고 혹시 복권이 맞지 않을까 기대하는 분위기다. 이래서 뻔히 알면서 역사적 우행들이 되풀이되는가 보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