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낭인이 본 1893년 조선의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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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무대로 청국과 일본이 충돌한 청일전쟁 기운이 한창 무르익던 1894년 7월1일, 일본에서는 조선잡기(朝鮮雜記)라는 책이 나왔다.

작자는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필명을 쓴 혼마 규스케(本間久介.1869-1919). 천우협(天佑俠)이라는 우익단체 회원이자 나중에 그 기관지 니로쿠신보(二六新報) 특파원을 역임하게 되는 혼마는 1893년 처음으로 조선을 찾았다.

부산에 체재하다가 경성으로 옮겨 남대문 인근 약방을 거점으로 매약 행상을 가장하면서 경기도, 황해도와 경기도 및 충청도 일대를 정탐한 뒤 도쿄로 돌아가 그 여행담을 1894년 4월17일자부터 6월16일자까지 니로쿠신보에 연재했다. 조선잡기는 바로 이 연재물을 154편으로 정리한 단행본이었다.

그는 왜 하필 이 때 조선을 찾았을까? 1893년 봄에 동학농민군 봉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혼마 스스로는 말한다. 즉, 조선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서 조선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이면서 한국근대사 전공인 최혜주 박사는 당시 조선의 사정과 풍속 전반을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이 조선잡기를 통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이룬 문명국 일본이 타자의 시선으로 '미개화'된 조선을 바라보는 '야만과 문명'의 교차점을 읽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증상들이 조선잡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최 박사는 조선잡기 전편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은 "순진함, 무사태평과 함께 불결, 나태, 부패" 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혼마에게 '기이한 풍속'으로 다가간 것 중 하나가 조혼. 이르면 12-13세밖에 되지 않은 남자 아이가 20살 안팎인 여자와 결혼하는 일이 조선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서 "어린 남녀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조선의 인구가 매해 감소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는 분석을 곁들이기도 한다.

화폐로는 동전인 공방전(孔方錢) 외에는 통화가 없는 조선인들에게 지폐를 보여주었으나 그 효용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평하는 모습을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평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혼마는 조선의 목욕 문화를 전하면서 조선의 불결함을 부각하기도 한다. 겨울철에 황해도 해주로 갔다가 한달 동안이나 목욕을 하지 못해 객사 주인의 안내로 찾은 목욕탕 풍경을 조선잡기는 지옥에 견주었다.

목욕탕이란 곳에서 만난 10명 가량 되는 조선인을 "모두 살이 없어 말라, 이 세상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묘사와 함께 흥미롭게도 당시 조선의 목욕탕이 "옥상에다가 불을 피우고 집 아래에서 열을 뽑는" 방식이었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혼마는 일본이 어떻게 해야 조선에 대한 청국의 야심을 꺾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에 일본인이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산에는 청국인보다 일본인이 많지만 다른 지역, 예컨대 경성에는 일본인이 턱없이 모자란다고 지적하면서 "거류지 인민의 많고 적음은 무엇보다 그 세력의 강약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가 하면, "만약 하루아침에 풍운의 변이 이곳(경성)에서 일어난다면 누가 한강을 끼고 한산을 옆에 두어 이 하늘이 준 형승(形勝)을 차지하겠는가"라고 강개하기도 한다.

이런 정치색 짙은 언설 외에도 조선잡기는 불과 1세기 전 조선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대목이 많다. 양산 대신 우산을 쓰고 의기양양해 하는 조선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갓도 벗지 않은 채 싸우는 장면, 서당에서 아이들이 소리 내면서 책을 읽는 풍경, 소금을 보물처럼 여기는 사람들, 남색(男色)과 창기에 관한 증언도 보인다.

이 조선잡기가 최 박사에 의해 '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조선잡기'라는 제목으로 국내 처음으로 완역되어 나왔다.

김영사. 324쪽. 1만3천원.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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