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週를열며>開闢과 개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올해 성탄절은 유난히 썰렁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무척이나 뜻깊은 성탄절이 되었다.역사청산 또는 역사 바로세우기 등의 이름으로 불어닥친 정치개혁의 강풍 속에서 모든 것이 움츠러들 수밖에없으니 성탄절이라고 여느 때처럼 흥청댈 수도 없 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그리고 어쩌면 성탄절은 깊은 겨울에 소리 없이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려와 어둠을 밝힐 만큼 환하게 세상을 만드는 그 밤에 고요히 다가오는 평화와 같은 것이기에 요란을 떨어서도안될 것이다.
그런데 올해 성탄절이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축제가 된 이유는 우리들이 지금 새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특별검사제는 채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야의 합의에 따라 마침내5.18특별법이 제정됐고,반역(叛逆)과 오욕(汚 辱)의 역사를바로잡을 계기를 마련했으니 이 어찌 새 세상을 향한 새 역사가아니겠는가.적어도 국민의 마음 속에는 힘의 논리나 정치적인 계략에서가 아니라 그토록 우리가 피 흘리며 염원해 왔던 민주화의역사가 제대로 돌이켜 평가되고 그 기틀 위에 새 역사가 서야 한다는 큰 기대가 있다.
이제 검찰과 정부가 이 일을 명예를 걸고 이뤄내야 한다.소리만 요란하다 지나가 버렸던 과거와 같은 역사청산이 아니라 우리모두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 역사가 이뤄져야 한다.그러므로 역사 바로세우기는 우렁찬 구호나 몇몇 사 람들의 처벌로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역사의 실체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정부나 여당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밑바닥으로부터 온 국민의 뜻과 합의의 과정에서 이뤄나가야 하는것이다. 사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12월25일로 정해진 것은 따지고 보면 기독교적 전통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근동(中近東)지방의 신앙과 생활관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절기인 동지(冬至)가 지나면 서서히밤은 낮에 의해 물러가기 시작한다.그것은 빛이 어둠을 이기는 새로운 날의 시작과 다름없다.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어둠이 빛을 가릴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지혜를 가졌던 사람들은 자연현상으로 보지 않고 인류의 역사와 하느님의 역사로 이해한 것이다.
성탄 카드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방박사의 그림도 지혜를 가진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빛의 새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새 역사는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고,또 그 생명은 희망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그러기에 아기 예수를 잉태했던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습니다/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 시고/부요한 사람은 공수(空手)로 돌아 보내셨습니다」(공동번역 성서에서 인용).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탄절은 단순한 종교적 축제일 수 없고,예수의 탄생을 경하하는 기념일일 수도 없다.그것은 새로운 변혁의 역사를 가져오는 새 출발점이며 원동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일찍이 이사야가 어둠과 억압과 고통의 역사 한 가운데서 꿈을꾼 것처럼 우리도 지금 평화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고,정의가 우리를 거느리게 하는 세계,사자와 새끼 염소가 함께 정답게 살 수 있는 세계,그리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세계를 내다봐야할 것이 아닌가.
우리 문화 속에서도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으면서 온갖 재앙을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개벽(開闢)의 새 역사를 내다보지 않았던가.악을 악으로 갚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지혜로운 화해의 새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지금 우리가 그 토록 견디기 어려웠던 한해를 보내면서 이 성탄절에 해야 할 일은 징벌(懲罰)보다 앞서 회개(悔改)를 먼저 하는 일일 것이다.오늘밤 무릎을 꿇고 『고요한 밤,거룩한 밤』노래를 부르며 내일을 향해 자신을 가다듬어 보자.
(성공회대학교 총장) 이재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