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방>'부부의 性까지 벗기는 방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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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사회에 미치는 텔레비전의 다각적인 영향력은 더 말할 필요도 없어졌지만 금년만큼 그 막강한 위력을 실감있게 보여준 예도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삼풍참사를 비롯한 각종 대형사고와 한치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정치적 격동이 끊임없이 되풀이 된 금년 한햇동안 텔레비전의 카메라들은 그때그때 현장의 생생한 모습들을신속하게 전달함으로써 텔레비전의 위상을 한층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혼란으로 모든 문화현상들이 위축된 가운데 텔레비전은 독서도,전시회도,극장도 모두 시들해진 시청자들을 수상기 앞에 단단히 붙잡아 놓았다.대다수의 국민들이 문화의식은 가물가물해진 채 슬픔도,기쁨도,열패감도,성취감도,분노도,만족도 모두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방송을 문화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없느냐는 조심스런 논란은 한켠으로 밀어놓고 어느새 텔레비전은 모든문화현상의 상좌(上座)에 「군림」하기에 이르렀다.이쯤되면 어떤내용을 방송하더라도 대중에 미치는 영향이야 어 떻든 시청률만 높으면 그만이라는 묘한 「자부심」이 방송인들의 의식을 지배할 법도 하다.
몇몇 프로의 상식을 벗어난 내용들은 이제 그 「자부심」이 아슬아슬하게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성(性)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대표적인 예로 꼽힐만 하다.드라마에 흔히 등장한 혼외정사(婚外情事)니,불륜이니 하는 것들은 낡은 수법이돼버렸고,부부만의 은밀한 침실이나 내밀한 성관계가 공공연히 공중파방송을 타기에 이르렀다.
신혼부부를 등장시킨 텔레비전의 한 토크쇼는 이렇게 진행된다.
「단 하나 불만이라면 아내가 잠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듯 한데…」라는 자막(字幕)이 나오고 대화가 시작된다.아내가 남편과의 성생활 횟수에 불만을 토로하고 사회자.방청객이 가세해 「한달에 한번」이니 「하루에 한번」이니 하는 낯뜨거 운 대화들이거침없이 오간다.결혼전 남편과 친구등 셋이서 술을 마시다가 너무 늦어 함께 여관방에서 잔 일도 있다고 털어놓는가 하면 「신랑의 코가 커서 기대했는데 한달에 한번도 안하더라」는등 도무지음침한 뒷골목에서나 나옴직한 얘기들 뿐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최근 부부의 성문제를 여러 프로그램이 경쟁하듯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어떤 코미디 프로는 주부들의 신청을 받아 침실의 분위기를 바꿔준 뒤 몰래 카메라로 침실에서의 남편 반응을 살피기도 하고,또 어떤 프로 는 부부를 출연시켜 어느 한쪽에 최면을 건 다음 이성(異性)관계를 묻는등프라이버시 침해도 예사다.군복무중 휴가나왔다가 길거리에서 모르는 여자를 납치해 폭행으로 하룻밤 같이 보낸뒤 여자의 가족들을설득해 결혼했다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게 한 라디오 프로도있다. 방송국마다 심의기구가 있고 사전 심의가 의무화돼 있다면이런 내용의 프로가 여과없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양해사항이라는 얘기가 된다.「성개방 풍조가 더욱 확산되고 있으니까」 혹은 「심야방송이니까」 이 정도의 내용은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방송 실무자들의 변명도 이해할만한 여지는 있다.하지만 이같은 내용의 프로들이 최근 우리사회의 분위기와 관련한 텔레비전의 기능이나 위력과 무관하지 않다면 범상하게 봐넘길 일은 분명 아니다.
부부만의 내밀한 성문제가 대중매체에 오르내리는 것을 경계해야하는 까닭은 신성해야할 부부관계가 한낱 우스개나 천박한 화제의대상으로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할 우려가 다분하기 때문이다.「부부의 성」이 계속 이런 식으로 까발려진 다면 조만간 부부관계의 순수성은 빠져나올 수 없는 추악한 수렁속으로 곤두박질할는지도 모른다.그 위상과 영향력은 충분히 입증됐지만 그렇다고「TV가 만능」은 아니며,무엇이든 멋대로 방송할 수 있는 것은더더욱 아니다.
(논설위원) 정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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