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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자격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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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600명 가깝게 응시를 했다고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도전한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전혀 없다. 홈페이지(www.cineq.or.kr)에 오른 후기를 보니 “재미있는 경험” “뿌듯한 시험”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시험문제를 주변 기자들에게 불러보았다. “황당하네요” “시험 맞아요”라는 반응이 주류였다. 예컨대 이렇다.

Q. 다음 중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닌 작품은?

ⓐ사랑의 레시피 ⓑ식객 ⓒ박하사탕 ⓓ라따뚜이

정답은 3번이다. 영화와 거리를 두고 산 사람이라면 좀 어려울 수도 있다. 다음 문제는 개그 프로 같다. 영화를 보았든, 안 보았든 상관없다.

Q. 1970년대 최인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별들의 고향’에서 “아름다운 꿈이에요. 내 몸을 스쳐간 모든 사람이 차라리 사랑스러워요”로 기억되는 주인공 경아의 직업은?

ⓐ쇼걸 ⓑ호스티스 ⓒ아프레걸 ⓓ페미니스트

정답이 궁금하다면 홈페이지를 찾아보시길! 상당한 ‘내공’이 요청되는 문항도 있다.

Q. 폴란드 출신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시리즈가 아닌 것은?

ⓐ화이트 ⓑ블루 ⓒ레드 ⓓ그린

홈페이지에 있는 문제 해설이 ‘가관’이다. “공식 교재 상권 68p 참조”로 시작하면서 감독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다. 교재를 외웠다면 맞힐 수 있다는 것이다.

사설(辭說)이 길었다. 8일 전주·서울·부산 3곳에서 실시된 ‘제1회 영화전문사 자격시험’ 문제다. 영화전문사라는 용어가 생소하거니와 영화 지식에 자격증을 주겠다는 발상 자체가 경이로웠다. 50문항 가운데 70점 이상은 3급, 80점 이상은 2급, 90점 이상은 1급 자격증을 수여한다.

무엇보다 주관처가 전주시 산하 전주정보영상진흥원이라는 점이 놀랍다. 지자체가 퀴즈대회를 여는 것에 딴죽을 걸 뜻은 없다. 대중문화의 맏형인 영화를 즐겁게 갖고 노는 방편일 수 있다. 하지만 정색을 하고 자격증을 주겠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상상을 초월한다. 더욱이 문제의 70% 이상을 공식 교재에서 출제한다고 하니 소위 저의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교재에 수록된 정보가 잘못되거나, 아예 문제를 잘못 내 정답을 두 개 이상 처리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주최 측이 교재 장사를 노린 것은 아닐 터다. 부산 다음의 ‘영화도시’로 꼽히는 전주시의 문화 마케팅이다. 이번 시험으로 ‘영화의 도시’ 전주를 알리고, 영상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주영상원 관계자는 “자격증을 딴 사람은 영화제 스태프나 국내 영화사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력서에 ‘한 줄’을 추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주변 영화인에게 물어보았다. 반응은 차가웠다. “뭘 하자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게 다수였다. 퀴즈 게임과 영화 실무 사이에는 별다른 함수가 없다고 답했다. 사실 영화 자격증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영화전문지 ‘기네마준보’가 2005년 도입했다. 실제로 전주영상원은 기네마준보와 협약을 맺어 올 시험을 치렀고, 예상문제집도 기네마준보 것을 상당 부분 차용했다. 일본 민간잡지가 심심풀이로 시도한 것을 우리가, 그것도 공공기관이 쌍수를 들고 껴안은 꼴이다. 주최 측은 향후 한·일 영화검정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인증도 추진할 계획이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있을까 싶다.

영화 자격증? 영화에 대한 시대의 ‘강박’이 느껴졌다. “다음 중 ○○○가 나오지 않는 작품은? ○○○가 연출한 작품이 아닌 것은?” 이런 4지선다형 문제로, 배우와 감독 이름을 달달 외우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이해를 평가할 수 있을까. 이러다 가요 자격증, 드라마 자격증이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올 전주영화제에선 ‘영화 검정 골든벨’이 화제였다. 전주시는 거기에서 그쳐야 했다. 놀이는 놀이에서 끝나야 했다. 세금은 그런 데 쓰는 게 아닐 터다.

박정호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