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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둘째 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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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촛불시위가 한 달을 넘겼다. 꺼지지 않고 늘어나는 촛불을 보며 이명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청와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대통령은 밤 12시 전엔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기상 시간은 오전 5시. 맨 먼저 드는 생각은 억울함이 아닐까. ‘밤잠 안 자고 일했는데 신문을 봐도, TV를 봐도 온통 나를 욕하는 사람들뿐이다. 인터넷에선 취임 100일도 안 돼 탄핵 서명까지 시작했다.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억울함은 분노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아직도 이 땅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많다. 그들이 순진한 어린 학생들을 부추겨 광우병 괴담을 퍼뜨린 뒤 촛불을 들불처럼 확산시키는 게 아닐까. 이들에게 밀려선 안 돼’.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의 하나 대통령의 마음속에 터럭만큼이라도 이런 조각들이 남아 있다면 큰일이다. 청와대가 예고한 민심 수습책이 자꾸 늦어지는 걸 보면서 드는 불안한 가정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일 미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는 형태였지만 “한국을 통치하는 게 매우 힘든 일이라는 점에 동의한다”고 했다. 5년 전 이맘때 노무현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 사태가 이어지고 한나라당의 반대로 인사안이 거부되자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토로했었다.

어쩌면 지금 이 대통령의 심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고행을 먼저 끝낸 노 전 대통령일지 모른다. 그래서 “쇠고기 협상이 아무리 잘못됐더라도 정권 퇴진으로 밀어붙이는 건 안 된다”(7일 노사모 총회에서)고 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이쯤에서 이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람들은 돌아봐야 한다. 100여 일간의 발자욱을. 쇠고기와 촛불이 대치해 꼬인 정국의 해답은 거기서 찾아야 한다.

지난해 8월 한국의회발전연구회와 함께 대선 후보 자질평가 기획을 한 일이 있다.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대통령이 됐을 경우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국내 현안과 대외 현안이 뭐냐’고 물었다. 보내온 답변은 ‘일자리 창출’(국내)과 ‘한·미 관계 복원’(대외)이었다. 그러면서 FTA 추진에 대해 이 후보는 ‘대통령의 의지(40%)-국회의 협조(20%)-언론의 협조(20%)-국민의 대중적 지지(20%)-관료(0)%의 순서’라고 대답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초 외교 노선과 행보는 10개월 전 답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대통령은 쇠고기 협상을 한·미 FTA 비준을 위해 한시가 급한 과제로 생각했다고 한다.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동력도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실적을 중시하는 대통령의 기질은 그래서 쇠고기 수입을 한·미 동맹 복원과 ‘주고받기’했다.

하지만 뉴미디어의 발달로 ‘나는 네가 오늘 이 순간 하는 일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국민에게 중요한 건 결과보다 과정이다. 이번 쇠고기 협상은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면 ‘도로아미타불’이란 걸 이명박 정부는 간과했다. 진보층의 지지 속에 당선된 노 전 대통령조차 국익론으로 체결한 한·미 FTA 협상 결과를 지지층에게 설득하지 못해 고생하며 임기를 마쳐야 했다. 이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람들은 정권 교체기에 그걸 생생한 라이브로 봤다.

이런데도 국민을 더 화나게 한 건 서울광장에 유모차를 끌고 모여든 ‘엄마’들로 하여금 중국 쓰촨성 지진피해 현장에 간 한국 대통령이 “나도 눈물이 난다”며 중국인을 보듬는 장면을 뉴스로 보게 했다는 점이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와신상담, 정권교체를 준비했다는 사람들의 실력에 대실망하며.

지난 일에서 교훈을 삼을 게 아니라면 역사를 배울 이유가 없다. 쇄신은 자기 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잘한 부분도 있는데’라는 미련으론 답이 안 나온다. 2008년 6월 둘째 주는 이 대통령의 남은 1700일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다.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