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과 문화

‘얼리버드’만 새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새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인 ‘얼리버드’만 생산성이 높을까. 물론 주행성 새들끼리의 먹이경쟁에서는 ‘얼리버드’의 생산성이 압권일 것이다. 그러나 새들의 세계에는 주행성 새들만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야행성 새도 수두룩하다. 대표적 상징 새인 올빼미를 비롯, 소쩍새·부엉이·두견새도 야행성 새에 속한다.

밤에 활동해야 생산성이 더 높은 이 새들처럼 밤에 잠 안 자고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도 생산성을 낸다. ‘얼리버드’가 농경사회·산업사회를 압축해서 살아온 사람들의 중요한 덕목인 시절도 있었지만, 정보시대를 가로질러 이야기산업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은 아침부터 일하는 사람 못지않게 밤새도록 놀며 상상하는 사람도 고부가가치를 내는 생산활동을 한다. 작가·게임개발자·만화가·작곡자들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부모 속을 태우던 게임중독 청년이 어느 날 기발한 게임콘텐트를 개발해 수출로 국부에 기여하는 일은 주변에 많다. 놀면서(?) 상상하는 사람들이 디지털 콘텐트와 결합해 내는 생산성이 국가의 핵심 동력이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얼리버드’가 이끄는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4.5%다. 이에 반해 올빼미족이 주력인 이야기산업의 성장률은 9.8%로 두 배가 넘었다. 같은 시기 중국의 GDP는 8.9%. 반면 이야기산업 성장률은 26.5%, 세 배에 육박한다. 이젠 소비의 측면으로만 치부했던 놀이의 영역이 곧 경제의 중심이 되어 생산의 동력을 이끌고 있다. 그냥 재미로만 알았던 이야기산업과 서비스 경제의 확대가 선진 산업구조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음은 선진국 경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도 ‘쏜살같이 달려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미래’ 앞에서 쑥스러운 말이 됐다.

이렇게 다원화되고 획일화의 잣대로 잴 수 없는 세상 한가운데 탄생하고 자라난 신인류가 바로 요즘 20, 30대다. 물론 이 중에는 ‘얼리버드’도 있지만 밤을 패는 올빼미족이 적지 않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선’이고 ‘노는 것이 악’인 가치관에 길들여진 구인류의 시각으로 볼 때 맘에 안 드는 것 투성이다. 음식점에 가거나 커피숍에 가도 이들은 특이하게도 오랜 인류학적 관습인 밀실 선호나 구석자리 선호를 버리고 가운데 자리부터 앉는다. 자아의 발현 욕구가 강하고 감춤도 없으며 당당하다. 놀이하듯 일하기를 원해 급여보다 자아실현을 위한 직장을 선호한다.

그런 다원적 가치를 추구하는 신인류의 특성은 구인류의 전용 공간이었던 단관 영화관을 망하게 했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탄생시켰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다양성에 기초한 가치관도 이런 신인류의 진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잘 노는 방법을 몰라 막 놀 수밖에 없는 구인류와 달리 재미있고 즐거운 삶에 대한 폭발적 수요는 지금 문화의 시대라는 불길로 타올랐다. 이야기산업뿐만 아니라 일반 제조업도 브랜드라는 기업의 이야기를 담아야 생존하는 시대를 열었다. 이뿐이랴. 스포츠도 경제의 영역으로 깊숙이 끌어들였다. 고전적 경제학 이론인 노동·자본·토지라는 생산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냈다.

지금 모든 세대가 참여하고 있다는 광우병 파동 촛불집회의 중심에 20, 30대가 있다. 오직 경제 외의 다른 가치는 없이 ‘4만 달러 국민성공시대’를 열겠다는 ‘얼리버드’식 사고의 구인류는 지금 불행하게도 촛불 든 야행성 신인류의 감각과 세계관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민건강이라는 작지만 큰 신인류의 근심을 친북·경제불만 세력 정도로 치부하며 정신과 도덕의 문제보다도 토목공사 등 시대착오적 물질 몰입정책을 밀어붙이다가 맞이한 사태다.

‘얼리버드’식 통치가 절대적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오류다. 한밤중에도 먹이활동을 잘하는 새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을 인정하면 난국을 푸는 해법도 보이지 않을까. 이제부터라도 대통령은 신인류와 소통하는 방법을 강구하라. 올빼미도 새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