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과거청산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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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5.18특별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이제 우리는 한국 현대사를 짓눌러온 가장 어두운 한 페이지를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사실 전제주의나 독재정권의유산을 청산하는 문제는 프랑스대혁명 이후 세계 도처에서 신생 민주정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섣부른 과거청산은 반발과 혼란을 초래해 어렵게 탄생한 민주정부의 싹을 꺾고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는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먼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정의를 실현하는 차원이다.불법적인 정권획득 과정에서 헌정(憲政)질서가 파괴되고 수많은 무고한희생자가 났는데도 불법을 자행한 세력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법과정의가 바로 서기 어렵다.다른 하나는 과거의 잘못을 처벌함으로써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차원이다.헌정파괴자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물음으로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잡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철퇴를가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헌정파괴의 책임을 묻고 독재의 잔재를 일소해야 할 당위성은 분명하지만 과거청산작업은 결코 간단치만은 않다.80년대중반이후 민주화의 물결로 세계 도처에서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새정부가 들어섰다.새정부는 대부분 과거정권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에 부닥쳤으나 해당국가의 정치문화,민주화 전환과정,새정부의 권력기반,새정부와 과거정권에 대한 국민 태도의차이에 따라 과거청산의 방식은 달랐다.
군부 권위주의를 경험했던 중.남미의 경우 새로 탄생한 민주정부는 권력기반이 취약했고 여전히 강력한 군부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그 결과 새정부의 과거청산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섣부른 과거청산은 군부의 반발 을 초래해 헌정의 위기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한편 동구(東歐)의 경우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새정부가 들어섰으나 권력분립이나 사법부의 독립등 민주적 제도는 여전히 취약했다.그 결과 과거청산도 초법적인 방식으로 시행됐고 이 과정에서 과거 국가조직에 몸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되는 보복성 청산도 적지 않았다.
중.남미나 동구의 경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점을 시사해준다.
무엇보다 과거청산의 당위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청산작업은 매우 신중히 진행돼야 한다는 점이다.성급한 과거청산은 군부권위주의 30년을 거치면서 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초래해 문민정부의 존립자체를 위협하게 될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金대통령의 5.18특별법 제정 결정에 대해선 정국타개를 위한정략적 결정이라는 의혹도 있고 진작 했어야 했다는 비판도 있다.정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치적 의도가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문민정부 출범이후 군개혁,정치자금 안받기,금융실명제 실시 등 일련의 개혁의 축적으로 이제 마침내 굴절된 과거사의 핵심을 짚을수 있는 기반이 조성됐다고 볼 수 있다.
서양속담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선의(善意)로 포장돼있다」는 말이 있다.또「선(善)의 적(敵)은 최선」이라는 말도있다.과거청산작업에서 모든 것을 다 뒤집어 엎고 새 시대를 창조하자는 식의 이상론은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과거청산이란 현실의 여건을 냉철히 파악하고 균형감각을 가지고신중히 문제를 풀어나갈 때만 보다 나은 미래로 연결될 수 있다.또 잘못된 과거청산 명분아래 헌법을 위배하거나 또 다른 무고한 속죄양을 만들어선 안된다.우리는 과거청산에 있어 파괴적이거나 한(恨)을 푸는 방식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법과정의가 살아있는 나라를 건설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통일을앞두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또 한번 닥칠 민족적 과거청산을 염두에 두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 이다.
(외교안보연구원교수.政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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