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꺾인 재정부의 환율 고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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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 30면

꼭 지난해 이맘때였다. 대학 선배와 밥을 먹다가 ‘환율 안주’가 식탁에 올랐다. 그는 ‘외환위기 모험담’을 꺼냈다. “미국에 연수를 갔지. 원-달러 환율이 2000원에 육박했어. 회사가 학비를 못 보내더라.” 미리 원화로 지원금을 못 박았는데, 원화가 헐값이 되니 속수무책이었다는 소리다. “짐을 싸려다 겨우 송금을 받아 공부를 마쳤어. 요즘 환율이 920원대로 떨어졌다니 격세지감이지….” 당시 기자는 ‘환율 하락’ 특집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1년 뒤. 언제 이런 얘기를 나눴는지 무색하게 환율이 뛰고 있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대야 하는 기러기아빠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안 그래도 치솟는 물가 압박은 배로 심해졌다. 유가 상승과 겹치며 경유 값이 2000원 가까이로 치솟은 게 대표적이다. 시장을 다녀온 주부의 장바구니엔 물건보다 한숨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한다.

환율도 상품이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오르내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요즘의 환율 상승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시장이나 국민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다. 기획재정부의 ‘구두 개입’이 너무 잦았기 때문이다. 강만수 장관과 최중경 차관은 ‘수출을 늘리고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려면 환율이 올라야 한다’며 공공연히 상승을 부추겼다. 가계의 물가 고통, 기업의 환차손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일자리를 잃는 게 좋으냐, 물가가 약간 더 오르는 게 좋으냐는 선택의 문제”라며 국민을 압박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이러길 석 달째. 올해만 10% 넘게 오른 환율은 이제 롤러코스터 같은 변동성까지 더해져 시장을 괴롭히고 있다. 정부가 원하던 효과보다 부작용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주엔 1분기 해외 신용카드 사용액이 전년 대비 30% 증가해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환율이 상승하면 ‘서비스 수지’가 개선될 것이라는 재정부의 생각이 탁상공론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마침 최중경 차관은 지난달 29일 한 강연에서 “원자재 값 급등에 따른 서민생활 어려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고환율 정책의 수정을 시사했다. 최 차관은 “수출회사 중역이 가족을 해외로 보내면 송금 때 환율이 떨어지는 게 좋을 거고, 회사를 생각하면 환율이 오르는 게 나을 것”이라며 정책 펴기가 어렵다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정책 당국자로서의 고민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강 장관이나 최 차관에겐 책임이 있다. 정책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1+1을 2 이상으로 만드는 경험과 노하우를 국민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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