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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야기- MY STORY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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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 04면

내 삶의 드라마, 내가 쓰고 즐긴다
- 자기 계발·인생 정리 위한 자서전식 글쓰기 활짝

소년·소녀의 태를 벗지 못한 남녀가 사모관대와 원삼 족두리 차림으로 앉아 있다. 19세 신랑 오창옥씨와 18세 신부 라매호씨다. 빛 바랜 흑백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예감하기엔 너무도 젊고 청초한 모습이다. 1944년 음력 2월 21일 결혼식 이후, 이들은 10년마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결혼 30주년 무렵 두 사람은 나란히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40주년엔 남편 오씨의 앞머리 숱이 많이 줄었다. 8·15 해방과 한국전쟁, 고도성장의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부부는 한 번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8남매를 낳고, 이들이 각각 결혼해 얻은 친·외손자까지 33명이 한 가족이 됐다. 2004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가족 사진에서 부인 라씨는 고운 은발의 자태로 남편과 나란히 웃고 있다.

가족사 정리하는 자서전 프로그램
라씨는 “되돌아보니 잠깐이었다”고 인생 소회를 밝힌다. 올해 초 만들어진 『오창옥·라매호 가족 이야기』에서다. 100여 컷의 사진과 함께 두 사람의 탄생·성장·결혼·신앙·사업·친교·투병까지 담담히 기록한 책자다. 첫딸을 낳자마자 오씨가 일제 징용군으로 끌려간 사건, 1960년 자유당 부정선거의 태풍으로 오씨가 고창경찰서 서장직을 사임한 일 등 드라마 같은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회혼식을 전후해 셋째 며느리의 권유로 인생사를 정리하게 됐다는 라씨는 “족보가 있어도 젊은 세대들이 잘 보질 않는데, 살아온 나날과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책 한 권에 담으니 뿌듯하고 보람된다”고 말했다.

칠순이나 금혼(결혼 50주년)·회혼 등은 개인에게도 각별하지만 가족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일회성 잔치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프로그램이 최근 뜨는 이유다. 윤재횡·유금심씨 부부도 윤씨의 칠순을 맞아 가족사를 정리하는 책을 냈다. 모두 감성계발연구소(02-352-4708, feelcenter.or.kr) 강윤희 소장의 작품이다.

강 소장은 지난해 말부터 ‘패밀리 스토리’라는 이름으로 한 가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대행하고 있다. 의뢰인 부부를 만나 성장부터 결혼,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생사를 구술로 듣고 글과 사진으로 정리해 책을 펴내는 것이다. 강 소장은 “자녀들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길을 정리하는 기회라 어르신들이 무척 흡족해한다”고 전했다.

디지털 민주주의로 ‘일반인 글쓰기’ 활발
“내 인생을 글로 쓰면 대하소설”이라고 소회를 푸는 이들도 꽤 있는데,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이 책을 내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일반인 대상의 글쓰기 강좌가 늘고, 출판업의 세분화에 따라 자비 출판 기회도 많아지면서다. 디지털카메라가 상용화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상물로 남기기도 쉬워졌다. 김기령 연세대 의과대 명예교수는 2005년 회고록을 내면서 수백여 컷의 사진을 중심으로 80 평생을 책에 담았다. 김 교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잘 보관하고 있었던 데다, 보는 사람도 글보다는 사진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 이런 회고록을 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서전 형식의 글쓰기는 젊은 층에서도 각광이다. 감성계발연구소는 ‘패밀리 스토리’ 이전부터 ‘마이 스토리’라는 프로그램으로 개인의 자기 계발 및 치유를 도왔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끔 글쓰기를 코칭하는 프로그램인데, 결혼·유학·이직 등 인생의 중대 고비를 앞둔 20~40대가 많이 찾는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인 2004년 여름 ‘마이 스토리’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정해련(23)씨는 “대학 진학을 못하는 상황에서 진로 고민이 심각했는데, 나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정체성과 관심사를 깨달은 기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정씨는 10주가량의 프로그램을 거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를 스스로 만들었고, 이후 파티 플래너와 방송 프로듀서 등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갔다. 강 소장은 “기업체에서 단체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요청이 많다”고 말했다.

기록하는 현대인, 매 순간이 드라마
린다 스펜스는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고즈윈 펴냄)에서 우리는 자서전을 씀으로써 “살아온 날들의 경험과 통찰력·지혜·겸손”을 타인과 나누게 될뿐더러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목적과 결심, 충만한 인생에 대한 인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전적 글쓰기를 통해 개인은 인생의 극적인 부분과 의미를 되짚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충만함과 자신감을 가져다 준다.

말하자면 현대인은 더 이상 TV·소설 속 드라마틱한 삶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기를 거부한다. 스스로 스토리텔러(storyteller)로 거듭난다. 미니 홈피 블로그 등 1인 미디어는 가장 간편하고도 개방적인 기록 매체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일 수도, 혹은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하는 ‘내 아이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최근 출간된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리처드 맥스웰·로버트 딕먼 지음, 지식노마드 펴냄)는 “이야기란 하나의 사실을 감정이라는 포장으로 감싼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기록하는 현대인의 내면엔 매 순간을 드라마 주인공처럼 만끽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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