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과학칼럼

스텔스 인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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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숭례문에 불을 지른 범인이 의외로 일찍 잡혔다. 근처의 교통 카메라 덕분이다. 사다리를 들고 숭례문에 오르는 모습이 교통 카메라에 찍혔고, 이 사람이 버스를 타는 장면이 버스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또한 일산에서 어린이를 유괴하려던 범인도 카메라와 교통카드 때문에 잡혔다. 아파트와 지하철 정거장 카메라에 찍힌 것은 물론이고, 이 사람의 교통카드가 내린 정거장을 알려주었다. 얼마 전에 아내를 살해한 의사는 자신이 설치한 병원 카메라 때문에 잡혔다. 이외에도 휴대전화 위치기록 때문에 붙잡힌 납치범과 협박 범인은 수도 없이 많다.

우리 현대인은 너무나 많은 흔적과 기록을 남기고 산다. 앞서 살펴본 휴대전화와 교통카드는 물론 신용카드도 기록한다. 어느 곳에 가서 어떤 물건을 샀는지 대부분의 자료를 남긴다. 우리 현대 도시인은 하루에 20개 이상의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을 남긴다고 한다. 또한 인터넷 검색을 하면 자주 방문하는 페이지가 어느 것인지 기록이 남는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 분석해 보면 ‘개인 행동양식’을 알 수 있다. 우리 현대인은 진정으로 ‘노출’의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미 우리는 조지 오웰이 말하는 『1984년』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사람의 데이터를 종합 분석해 보면 인간 행동양식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광산에서 광물을 캐듯 많은 데이터 속에서 유용한 정보를 추출해내는 분야를 ‘데이터 마이닝’이라 부른다. 수백만 명의 상거래 데이터는 너무 많아서 쓰레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데이터 마이닝 기술에 의하면 그곳에서 규칙을 찾아 유용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 이처럼 데이터 마이닝 기술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구체적인 데이터로부터 유추해낸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연구하는 철학과 심리학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신용카드 사용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아기의 기저귀를 사는 사람은 분유와 캔맥주를 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린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외출하지 않고 집 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사람은 물건 진열에 참고한다. 즉 기저귀 옆에 분유와 캔맥주를 진열할 것이다. 또한 광고 기획자들은 광고할 때 이런 상품들을 연계해 광고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젊은 부부를 위한 상품 기획에도 이용할 것이다. 또한 기저귀가 잘 팔리는 지역에는 유아용품 상점이나 소아과 의원이 들어설 것이다.

우리의 생활정보가 기록되어 범인을 쉽게 잡고 범죄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은 좋다. 또한 데이터 마이닝 기술이 유용한 정보를 추출해 우리 취향에 맞게 정보를 제공해 준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데이터들이 우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남은 기록이기 때문에 굳이 기록을 삭제하라고 요청하기도 어렵다. 해킹 등의 불법에 의하지 않고도 우리 사생활이 침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현대인은 언제까지 이런 ‘감시와 노출’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 나를 숨겨주는 ‘스텔스 기술’이 나올 것 같다. 필요시에는 나의 위치기록이 남지 않게 한다. 신용카드 사용기록도 남지 않게 한다.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특별 유료서비스도 나올 것이다. 카메라에 찍힌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빛을 난반사시키는 ‘스텔스 화장품’도 나올 것 같다. 사생활 보호와 침해는 앞으로 흥미진진한 창과 방패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인간의 행동패턴을 찾아 활용하려는 욕망과 ‘스텔스 인간’이 돼 은닉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이런 싸움 속에서 새로운 틈새시장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광형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미래산업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