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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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닌게아니라 끔찍했다.사제(私製)「고춧가루탄」으로 무장하고 다닌다는 소녀를 몰라라 할 수는 없다.사랑채에 묵게 하고 방을꾸몄다. 연분홍 실크 깔깔이로 커튼을 치고,먹감나무 탁자를 책상 대신 들이고,아늑한 빛을 뿜는 갓 스탠드를 곁들였다.모두 아리영이 쓰던 것이다.손님용의 이불.요에 새 홑청을 씌워 꽃분홍 누비 베개와 함께 붙박이장에 넣어 주었다.
신방 같았다.
애소는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내 방 갖는 건 처음이에요!』 『누구랑 한방 썼는데?』 『이모하고요.』 『이모?』 돌아간 애소의 어머니에겐 언니나 여동생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새어머니 동생이에요.이혼하고는 내내 우리집에 계셨거든요.아기 못낳아서 쫓겨나….』 그녀는 말하다 말고 홍당무가 되었다.
소장님 부인도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로소 생각이미친 것이다.
『그랬었구나.』 아리영은 오히려 태연했다.아이 문제도 이젠 더이상 번민거리가 아니었다.
몇 벌의 옷가지와 사과상자 하나에 담은 책이 이삿짐의 전부였다.학교때 교과서랑 노트가 절반인 그책 중에 『안데르센 명작집』이 있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우변호사 얼굴이 떠오르며 코펜하겐 건이 또 아리영 가슴을 죄었다. 『이 책 빌려 줄래?』 『안데르센 명작집』을 뽑아든 소장님 부인을 애소는 짐풀던 손을 멈추고 반가운듯 올려다봤다.
『안데르센은 재밌어요.어른을 위한 동화같애요.』 신통한 소리를 하는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으로 응했다.
사랑채에 묵기 시작한 후로 애소는 마당 건너편의 본채에 자주드나들었다.점심식사는 그 전대로 목장 식구들과 함께 식당서 하고,아침.저녁은 본채의 부엌 식탁에서 들도록 아리영이 배려했기때문이다.
처음 며칠 동안은 겁먹은 고양이처럼 웅크려 식사하더니 차차 활기차게 설거지도 하고 식사 준비도 돕게끔 발전했다.적응력이 강한 아이 같았다.
영양가(營養價)까지 생각해 조리하는 음식 솜씨도 좋아서 부엌은 어느새 애소의 「영토」가 되어갔다.
저녁 식사 후에 애소는 능한 솜씨로 사과를 깎았다.사과알을 손에 들고 뺑뺑 돌려가며 한가닥으로 얇게 벗기는 옛날식 깎음새다.이 껍질을 말려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 마신다는 것이다.통통하여 보조개가 패는 애소의 손을 지켜보다 남편이 말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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