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이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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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밥 딜런의 1960년대 행적을 주로 재현하는 뮤지션 주드 역의 케이트 블란쳇. 독보적인 남장 연기로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사람은 참된 인생을 알게 될까/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백사장에 편히 쉴 수 있을까/얼마나 많은 포탄이 휩쓸고 지나가야 더 이상 사용되는 일이 없을까/친구여, 그 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불어오는 바람만이 알고 있어….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포크음악의 음유시인’ 밥 딜런(67·사진). 그는 너무도 유명한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를 비롯한 일련의 히트곡으로 자유와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통기타의 군더더기 없는 음색에 실린,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며 때론 선동적인 가사는 격동의 시대를 살던 젊은이의 피를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정작 딜런은 자신을 규정하는 ‘시대의 양심’ 같은 용어를 편치 않아 했다.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에서도 그는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음악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구세주처럼 취급한다”고 적었었다.

29일 개봉하는 딜런의 전기영화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는 ‘그 누구도 아닌, 그저 음악가였던 밥 딜런’의 이야기다. 여느 전기영화와 달리 딜런을 실명으로 등장시키는 대신, 일곱 명의 ‘분신’ 혹은 ‘조력자’를 내세워 ‘어너더 사이드 오브 밥 딜런(Another side of Bob Dylan, 64년 발표한 앨범 제목)’에 가 닿으려 애쓴다.

연출은 ‘벨벳 골드마인’으로 음악영화에 대한 일가를 보여줬던 토드 헤인즈. 딜런 측은 영화 제작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딜런을 ‘음악천재’나 ‘시대의 대변인’식의 관점에서 그리지 말 것을 단서로 달았다고 한다. 헤인즈가 딜런 측에 건넨 제안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 영화가 어떤 창조적 삶의 너비와 흐름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고 가정하자.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영화는 결코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지닌 형태일 수 없을 것이다.”

제안서 도입부처럼 배우 여섯 명(크리스천 베일이 1인 2역)이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따로 또 같이’다. 음악적 변신 때문에 비난을 받는 뮤지션 주드(케이트 블란쳇), 저항음악을 지향하는 포크가수 잭, 포크뮤지션의 경력을 뒤로 한 채 가스펠 가수가 되는 목사 존(크리스천 베일 1인 2역)은 가수 밥 딜런의 삶을 재구성한다.

반면 잭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서 잭을 연기하는 배우 로비(히스 레저)는 사생활 면에서 딜런을 연상케 한다. 은퇴한 총잡이 빌리(리처드 기어), 시인 아서(벤 위쇼), 음악적 스승 우디(마커스 칼 프랭클린)는 위대한 가수에게 문화적 영감을 제공했던 인물들이다. 카메라가 일곱 대목으로 나뉘어 골고루 돌아가는 바람에 다소 집중력이 떨어지는 구성이긴 하다. 딜런의 음악을 모르는 세대에겐 버거운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숨을 돌릴 만하면 나오고 또 나오는 50여 곡의 명곡을 그저 듣고 있는 것만 해도 드는 포만감은 무시하기 힘들다. 주드 역의 블란쳇이 ‘배우 인생 최고의 선택’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여배우가 밥 딜런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며 가슴을 붕대로 감고 촬영에 임했다. 이 작품으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임 낫 데어’는 전국 8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스폰지하우스 중앙·압구정, 광화문 씨네큐브(서울), 야우리 시네마(천안), CGV 오리(분당), 대전아트시네마(대전), CGV 서면, 롯데부산센텀시티(부산)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주목! 이 장면 밥 딜런은 통기타 대신 전자악기를 택하고, 정치적 저항 대신 실연의 아픔을 그린 개인사를 노래하면서 “우리를 배신했다”는 대중의 혹독한 비난에 시달렸다. 영화에서도 식당에 간 주드(케이트 블란쳇)는 그에게 칼을 들고 달려오는 젊은이를 만난다. 주드가 ‘진실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주드는 소리치듯 되묻는다. “도대체 진실이 무엇이냐”고. 어쩌면 사람들은 진실이라는 무거운 짐을 딜런 같은 천재들에게 떠넘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언자’나 ‘메시아’의 이름표를 붙여서…. 자발적으로 택하지 않은 메시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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