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바로 여기서 잉태한 것일지 모른다. 원래 있었던 이야기, 거기에서 한껏 과장되고 슬쩍 얼버무려진 이야기, 결국엔 태초의 진실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분간이 안 되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가 하나 둘 쟁이고 서로 엉기면서 소설이란 장르는 생겨난 것인지 모른다. 손홍규(33·사진)의 두 번째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창비)를 읽고서 맨 처음 든 생각은 이처럼 생뚱맞았다.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다른 어떤 게 아니라 이야기란 이치는 너무 명백해 되레 무시되곤 했다. 게다가 잠깐 참신했던 실험이 금세 패러디(parody)되고 이내 클리셰(Cliche)로 전락하는 숨 가쁜 문단 풍토에서 소설은 스스로 이야기가 아닌 척 굴기도 했다.
하나 손홍규는 소설의 본래 꼴을 무연히 복원하고 있었다. 분명한 증거 몇 개가 있다. 우선 시점. 소설집엔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개중에 9편이 소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그러니까 마주앉은 독자에게 내 얘기 한 번 들어보시라, 능청맞은 목소리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식이다. 어찌 보면 근대적 의미의 소설 이전의 소설을 조우한 느낌도 든다. 유일한 예외가 단편 ‘매혹적인 결말’이다. 감옥 독방이 연상되는 좁은 방에 틀어박혀 주린 배 움켜쥐며 습작 끼적이던 작가지망생 시절의 경험을 옮긴 소설이다. 하니 1인칭은 피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또 다른 증거는 시제에 있다. 손홍규는 과거형 시제만 고집한다. 과거형은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가장 안정적이고 고전적인 시제다. 요즘 젊은 작가 몇몇이 현재형 문장을 부리곤 하는데, 그런 재기 발랄한 실험에 손홍규는 별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손홍규는 ‘구라’가 된다. 전라도 억양에 얹어 풀어내는 재담이 제법 차지다. 그가 ‘차세대 입담꾼’으로 통하는 까닭이다. 그는 또 이문구의 계보 안에 놓이곤 한다. 농촌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 몇 편이 눈에 띄어서다. 하나 손홍규가 재현한 농촌은, 정겨운 고향 풍경이 못 된다.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고속도로로 소떼 몰고 나간 응삼의 고장이고(‘봉섭이 가라사대’), 농약 중독으로 끝내 숨을 거두는 순옥의 논두렁(‘푸른 괄호’)이다. 따라서 손홍규를 농촌작가 따위로 한정하는 건 곤란하다. 그에게 농촌은, 강퍅한 생의 현장일 따름이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왜 비평은 손홍규를 주목하지 않을까. 이 야무진 소설에 비평은 왜 눈길을 주지 않을까. 아마도 그건, 손홍규 소설이 비평에 적합하지 않아서다. 2인칭 소설도 등장한 참에, 외계인이 소설에 수시로 출몰하는 마당에 손홍규는 어딘가 낯익어 보여서다. 하나 비평도 놓친 게 있다. 손홍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효가 만료된 옛 이야기가 아니란 걸. 버전 업(version-up)된 오늘·여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란 사실을.
손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