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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의 지각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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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정치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오랫동안 여의도 무대를 주름잡아온 두개의 대표적 정당이 휘청거리며 정치판 전체의 지형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한나라당은 비교적 빨리 체제 정비에 성공했고 보수층 및 영남권의 견제심리도 작동함으로써 일말의 회생 가능성이 엿보이지만, 민주당은 집안싸움하다 침몰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각종 여론조사는 2주째 열린우리당의 전국적 싹쓸이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적게 잡아도 과반수 차지는 거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물론 총선까지의 20일이란 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 한국 여론의 냄비적 속성을 감안할 때 상황은 순식간에 뒤집힐 수도 있다. 원로 정치인의 말대로 "어느 구름에서 천둥.번개 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바람의 심상치 않은 기세는 그 같은 반전(反轉) 기대감을 압도한다.

이 바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탄핵사태로 일시에 불어닥친 태풍은 그 방향이 두 야당을 곧바로 향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기존 정치 전반에 대한 철퇴다. 부패 정치, 당리당략에 눈먼 정치, 타협을 거부하는 대결 정치에 대한 일반의 분노가 축적돼 터져나온 회오리 바람이다. 고려대 이내영 교수 같은 이는 "과거 산업화 및 5, 6공 시절의 지배적 가치관과 단절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라고 해석하고 있다. 낡은 틀을 이제는 바꾸라는 명령, 이게 이번 바람의 요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은 바람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바로 이 대목에서 착각하기 쉽다. 자신들이 마치 변화를 주도하고 있어 지지를 받고 있다고 우쭐댈지 모른다. 그러나 현 상황은 열린우리당이 잘해서, 노력해서 만들어낸 게 아니다. 야당의 자살골로 절묘한 시점에 열린우리당이 반사이익을 얻고 있을 뿐이다. 민심은 현재 영등포 가건물에 일시적으로 입주해 있을 뿐 똑같은 상황논리에 따라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젊은 이미지의 신생 정당이라는 한가지만으로도 분명 노쇠한 이미지의 두 야당과는 차별화를 보인다. 특히 지역주의 배격은 시대적 흐름에도 호응하는 강점이다. 특정 지역에서 몰표를 받거나 배척되지 않는 전국 정당의 출현은 그 자체로 큰 진전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감각적이면서도 순발력있는 홍보전 역시 한발 앞서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동안 보여준 행태에선 기존의 정치 그대로다. 노란 점퍼 차림으로 시장바닥을 누비고, 폐건물로 당사를 옮기는 식의 알맹이없는 정치쇼로는 현재의 바람을 모두 흡수하기 어렵다. 돈정치 혐의로 탈락했던 인사가 버젓이 재공천되고, 선거법 위반자는 최다를 기록하고, 대결의 욕설정치도 여전하다.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불법이라고 우기는 장면에 이르면 정치논의의 천박성과 얍삽함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구호는 좋은데 깨끗한 손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어떤 미래를 펼쳐나가겠다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을 타고 있는 열린우리당까지도 바람의 참뜻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은 앞으로의 정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제도권에서 잠재우지 못한 바람은 더 큰 태풍으로 변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안겨줄 수 있다. 탄핵 반대나 찬성은 이제 더 이상 이슈가 아니다. 총선의 화두는 바람에 담긴 변화의 진정한 뜻을 직시하는 데서 찾아내야 한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