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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희망 이야기] 17년째 노인 사랑 '감초 원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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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경북한약방 정장로 원장(中)이 양지사랑의 집 수용자들과 활짝 웃고 있다. [서천=김방현 기자]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서 경북한약방을 운영하는 정장로(鄭長老.70)씨가 근무를 마치고 매일 들르는 곳이 있다. 한약방에서 1km쯤 떨어진 호암리에 있는 사회복지시설 '양지사랑의집'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17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나보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건강이 걱정돼 하루라도 건너뛸 수가 없어요"라고 鄭씨는 말한다.

25일 오후 7시30분쯤 鄭씨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13개의 방문을 차례로 두드렸다.

현관 앞에서 휠체어나 지팡이에 의지한 채 기다리던 노인들은 鄭씨를 어린애처럼 따라다니며 "원장님 오셨다"며 기뻐했다. 방 안에 있던 장애인들도 문을 열고 "원장님 오셨어요"라며 鄭씨의 손을 덥석 잡았다.

鄭씨는 일일이 이들의 안부를 물었다. 전기나 상.하수도가 고장 나지 않았는지, TV는 잘 나오는지도 빠짐없이 살폈다.

양지사랑의집은 1988년 鄭씨가 개인 재산 2억원을 들여 지은 복지시설이다. 1000여평에 자리잡은 단층 건물로 70세 이상 노인 10명과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2명 등 모두 12명이 살고 있다. 이들의 소일거리를 위해 텃밭 100여평도 마련했다.

그는 이들의 전기료와 난방비 등 경비(연간 1500만원) 일체를 부담하고 있다. 명절 때는 10만원씩 용돈도 준다.

鄭씨가 남을 돕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겪은 지독한 가난 때문.

경북 상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돈을 벌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무작정 대전으로 갔다고 한다.

그는 "단칸방에서 7명이 부대끼며 쌀겨죽이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당시 12세에 불과했지만 2남3녀의 장남으로서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한약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검정고시와 방송통신대학교를 거쳐 59년 한약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한약사 시험제도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발령지에서 개업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63년 발령지인 한산에 와 전 재산 5만원을 털어 한약방을 개원했다.

친절하고 진료 잘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환자가 몰려왔다.

鄭씨는 "농촌이어서 돈 한푼 없이 약을 달라고 찾아오는 환자도 부지기수였어요. 하지만 가난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못 본 척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지금도 하루 50여명의 환자 가운데 10%가량은 공짜로 약을 지어준다고 한다.

鄭씨는 돈을 제법 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불우이웃 돕기에 나섰다.

91년부터 설.추석마다 서천.논산.부여.보령의 복지시설 네곳에 700여만원씩 생필품을 기증해 왔다. 또 한산면의 장애인과 무의탁 노인 4명에게 10년째 20만원씩 지원해 오고 있다. 2001년부터는 서천군 저소득층 주민 65명에게 연간 1인당 30만원씩 총 1950만원을 전달했다.

서천=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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