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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핏물 홍건한 4·3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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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무자년 그 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누가 날렸는지 모를/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무명천 할머니-월령리 진아영' 중)

제주도의 허영선(47) 시인이 1983년 첫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이후 21년 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뿌리의 노래'는 48년에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의 처참하고 기구한 피해자들의 사연으로 시작한다.

1부 '여인 열전'에 묶인 피해자들은 남편을 잃고 모진 고문을 견디고 낳은 아이마저 돌을 넘기지 못하고 잃은 강도화 할머니('꿈인 거 맞지요'), 거꾸로 매달리는 물벼락 고문에도 끝내 이름을 불지 않은 홍보살('울멍 마농 먹듯') 같은 이들이다.

"거친오름 낮은 계곡으로 치달을 때/기어이 너는 세상을 열었구나/와랑와랑 핏물 흥건한 바닥에 너를 내려놓고/불속 뛰듯 달려야 했다 아가야"('죽은 아기를 위한 어머니의 노래' 중)

남원의 '고사리' 김할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살기 위해 내달리다 아이를 잃은 기막힌 경우다.

허씨는 모진 삶의 실타래를 최근 놓아버렸거나 아직도 근근히 이어가고 있는 4.3 사건 피해 여인들을 표제작 '뿌리의 노래'에서 억세게 땅을 움켜쥔 채 깊디 깊은 바윗돌을 잘도 견뎌온 늙은 뿌리로 표현했다.

결국 견딤이 문제가 된다. '한라산 고사목'에서 시인은 고사목이 "비울 것 다 비우고""기억의 뼛대 하나만 세우고도/저렇게 견딜 수 있다는 건/스스로 경계할 아무 것도/걸치지 않은 탓"이고 "근본으로만 살고 싶다는 소리 없는/외침"이라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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