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투데이

충돌과 공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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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상식적으로 국제정치를 힘의 충돌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힘을 이용해 상대국에 요구사항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힘이란 군사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력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을 동원해 제재를 가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말을 잘 들으면 원조라는 ‘당근’을 제공할 수도 있다.

때로 이런 국제정치에 국민이 동원될 때가 있다. 국민이 자국 협상자를 응원하고 상대국 협상자를 비난하는 경우다. 상대국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 어찌 보면 냉철한 국제정치 무대에서 이런 국민의 감정표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국제정치를 오로지 냉정한 손익계산과 당근·채찍의 협상으로만 간주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화가 이뤄져 국가 간 교류가 늘어나고 인적 교류도 확대되면서 때로는 좁은 의미의 국익으로 계산할 수 없는, 사람들의 감정이 국제정치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국내정치의 경우 사람들의 감정이 정치를 움직이는 것이 상식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역정서를 배려하지 않는 정치인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국내 지역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정치인 또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국민의 감정을 적극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인이야말로 큰 정치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국제정치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동아시아의 움직임을 감정의 국제정치로 보자면 우선 반감·반발의 국제정치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일부 보수 우익들은 역사인식을 둘러싼 이웃국가의 비판에 반발하는 형태로 그들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가 처음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겠다고 약속한 이유가 반드시 이웃국가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반발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외국의 압력에 굴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참배를 강행했다. 이를 지지한 일본 국민도 많았다.

당시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반발한 것은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 자체가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에 해를 끼쳤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이 반발한 진짜 이유는 감정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한·일관계와 중·일관계는 특히 물질적인 이익을 둘러싼 쟁점이 아닌, 이런 상징적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다.

그렇다고 국제정치에서 상징적인 문제가 꼭 부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004년 말 인도양에서 쓰나미가 발생하자 국제사회가 나서 지원했다. 이번 중국 쓰촨(四川)성을 덮친 대지진은 전 세계, 특히 동아시아인들의 동정과 연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지진 생존자 구조와 지원 자체는 단순히 인적 자원과 물자를 동원한 지원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상징적인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이번 쓰촨 대지진 피해지역에 보낸 구조대 규모가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는 한국민과 일본 국민의 중국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과 연대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국경을 초월한 공감의 움직임이 국제정치를 움직이는 것들이다.

안전과 이익을 추구하는 힘의 국제정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국민의 감정이 제약받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국민 감정이 국제정치의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을 갖지 않고서는 큰 정치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감정의 국제정치는 당분간 상징적인 면에서 계속될 것이다.

위험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반발과 반감의 국제정치는 상징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감정의 국제정치의 순기능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정과 공감의 국제정치는 앞으로 국경을 초월한 평화교류의 커다란 초석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나카 아키히코일본 도쿄대 교수
정리=박소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