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 떠나 부활한 오원의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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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06면

오원 장승업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일등 공신은 영화 ‘취화선(醉畵仙)’이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의 98번째 작품으로 제작된 ‘취화선’은 제목 그대로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 즉 장승업의 삶을 다룬 영화다. 임 감독과 도올 김용옥 선생이 각본을 함께 쓰고 촬영 정일성, 음악 김영동, 장승업 역 최민식으로 화제를 모았고 그해 칸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 ‘취화선’과 연극 ‘사로잡힌 영혼’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을 소재로 삼은 까닭을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승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1978년께였어요. 그때야 장승업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죠. 다만 이 사람이 임금이 그림을 그리라는데도 그게 싫어서 뛰쳐나갔다는 게 내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는 그런 게 속 시원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다가 2000년 12월에 서울대 박물관에서 장승업에 관한 세미나를 들으면서 비로소 영화로 만들어야겠구나 결심했어요.”

임 감독이 장승업을 선택한 이유는 네 가지였다. 첫째 그 생애가 영화로 다루기에 매력이 있다는 것, 둘째 지금도 장승업 그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는 것, 셋째 시대의 한계 안에서도 무언가를 해보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것, 넷째 장승업의 그림이 외세의 침략에 기울어 가는 나라와 그 와중에 부대끼며 곤궁한 백성을 위로하는 뭔가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화 몇 가지를 뼈대로 영상을 꾸려가자니 힘이 부쳤지만 임 감독은 ‘오원의 힘’으로 난관을 헤쳐 갔다고 회고한다.

“한 작가가 프로로서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정말 거듭나고자 평생 노력하는 그런 것이 소중하다고 봤지요. 확실하게 이룬 자보다는 미완이면서 완성으로 향하면서 이루어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만의 매력이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마음에도 가깝게 와 닿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오원 장승업 작 ‘추정귀선(秋庭龜仙: 가을 마당의 거북신선)’, 지본담채

임 감독의 이런 생각은 영화 속에서 최민식의 입을 빌려 대사로 터져 나온다. “문자향? 시서화 삼절? 좋아하시네, 니기미. 야! 제발이 꼭 붙어야 그림이냐. 그림은 그림대로 보기 좋으면 끝나는 거야. 그림이 안 되는 새끼들이 거기다 시를 쓰고 공맹을 팔아서 세인들의 눈을 속여 먹을랴구 그래. 여봐, 술이나 더 가져와!”

영화 ‘취화선’이 나오기 10년 전에 이미 오원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연극 한 편이 있었다. 국립극단이 91년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사로잡힌 영혼’이다. 이상현 작, 김아라 연출의 ‘사로잡힌 영혼’은 오원이 남긴 몇 가지 일화에 연극적 상상력으로 옷을 입혀 당시로서는 충실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냈다.

“고주망태 장승업, 일자무식 장승업, 그림 하나 잘 그려 감찰나리 되셨네, 감찰나리 되셨어”라는 노래가 들려오면서 사내들의 대사가 이어진다. “어, 일자무식 장승업이 정6품 감찰이라니!” “고향이 어딘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개구멍받이가!” “아주개 지물포에서 도배지 그림 시중들다가 손재주 하나 타고난 덕에.” “장가 그림에는 귀신이 붙었다며! 대나무를 그리면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나고 어부를 그리면 뱃전에서 노 젓는 소리가 난다며?” “장안에 권문세가 치고 장가 그림 한 장 안 걸린 집 없지!” “돈도 숱해 벌었어. 하지만 한 푼도 제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다네. 셈은 주모가 맡아서 다 했으니!”

연극 ‘사로잡힌 영혼’을 관통하는 한마디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다. 사대부 지식인층이 오원의 그림에 없다고 혀를 차는 이 말씀에 오원은 답한다. “그런 말씀 여지껏 수차 들었습니다요. 소인의 그림에는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고요. 한데 그게 뭡니까요. 아무리 들어도 무슨 소린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글자 그대로지. 문자의 향훈과 서책의 기운!” “그게 당최!”

오원이 문자향 서권기 대신에 그림에서 찾은 것은 무엇일까. “소인에겐 그림이 부모입지요. 그림이 밥 먹여주고, 술 먹여 주고 게다가 세상에서는 풀 수 없는 온갖 한을 그림 속에서는 다 풀게 해줬으니, 그보다 더한 부모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자신을 옭아매는 세상 쇠사슬 훌훌 털고 자유롭게 자연 속으로 들어간 오원은 읊조린다. “어찌 종이와 비단 위에 그린 것만이 그림이겠느냐… 종소리는 날줄로 풀 향기는 씨줄로 노을은 물을 들이니, 삼라만상이 어찌 이리도 거룩하고 아름다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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