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정보화 경주 한참뒤진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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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릇 세상 문물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게 없다.인간의 인식이 이러한 변화의 결과이자 원인이기도 하다.처음에는 기이로움 때문에 거부되던 것이 차츰 호기심의 자극으로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다 드디어 자연스럽게 수용되어 일상의 자리에 오른 다.그러다가세월이 가면 그것도 진부한 것으로 외면당하게 만드는 또 다른 신기(新奇)가 등장한다.오늘 의젓한 정통 가운데 부끄러운 미신으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 거의 없다.
변화라기 보다는 변덕스러움이 지배하는 것이 상품시장의 생리다.이는 주로 새로운 상품의 연구개발,기존 상품의 노후화를 계획하는 기업의 생산및 광고전략등 공급측면과 아울러 항상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수요 측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국내외 시장정보등 경제지식의 신속한 입수.활용이 개별기업의 성패는 물론 국민경제의 성쇠를 결정한다.
돌이켜보면 일제(日帝)가 물러간 다음 60년대초까지 기초적 경제정보.지식이 태부족했던 상황에서 그런대로 목마름을 달랠 수있었던 곳은 중앙은행을 비롯한 금융계였다.당시 은행출신 인사들이 다수 정부의 경제부처 요직에 발탁됐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경제지식의 비교우위 덕분이었다.민간기업의 정보.지식수준은 한때 개별공장의 운전,개별기업의 운영에도 힘겨운 수준이었다.
60년대초반 정부가 종합적인 경제개발계획을 편성.추진하면서부터 관료가 장악하는 경제및 기술정보의 양.질은 금융과 기업 부문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담겨진 투자사업 부문은 곧 한국경제의성장산업을 의미하였고,투자재원의 조달.운용방식은 곧 금융기관의억압과 국내외 특혜성 자금의 흐름방향을 결정하였다.이같은 정부주도형 개발단계에서 기업부문은 정부로부터 정보 입수와 관료 영입에 노력하였고 금융부문은 종래의 비교우위를 점차 상실하고 정부에 예속되었다.
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정보.지식 측면에서의 비교우위가 결정적으로 정부관료로부터 민간기업 부문으로 이전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는 그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성공이 초래한 아이러니였다.60년대 중반이래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 수출촉진에 힘입어민간기업들이 급성장하였다.일부 기업들이 대기업으로,기업그룹으로자랐다. 이들은 전세계적으로 영업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70년대중반에는 「종합상사」로 탈바꿈하였다.이들의 국제경제.금융정보는정부나 금융기관의 그것을 앞서기 시작했다.
해외공관의 정보활동이 비경제적인 측면에 편중되어 있고,더구나소속이 다른 주재관 사이에 정보의 풀링(공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한편 종합상사의 인기는 대학졸업 최우수인력을 흡수할 뿐만아니라 금융기관으로부터도 중견 전문인력을 탈취 할 수 있었다.
반면 금융기관은 강도 높은 금융억압 속에서 보수 및 수당의 대폭 삭감,자율기능의 상실로 경영의식이 마비되었다.이러한 상황은정부의 중화학공업 추진과 맞물리면서 한층 심화되었다.
70년대말 거론되기 시작하고 80년대 초부터 부분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한 민간주도형에로의 국민경제 운용방식은 흔히 그간 이룩된 국민경제의 규모확대와 구조의 복잡화 때문에 소수정예의 경제관료에 의한 정부주도형 방식의 한계에서 비롯되었 다.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정보.지식의 비교우위 자리다툼에서 정부가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단적인 예로 오늘날 주력 수출상품으로부상한 반도체의 경우 정부관료가 아닌 민간기업인의 혜안으로 성공하였다.
물론 민간기업에 의존하는 시장경제도 실패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정부에 의한 경제문제 해결방식도 동구권의 몰락에서 보듯 실패할 수 있다.결국 국민경제문제 해결은 시장과 정부의 기능이 혼재하는 혼합경제일 수밖에 없다.
퍼스널 컴퓨터의 보급확산,고성능 컴퓨터의 기능강화,각종 소프트웨어의 개발등 정보화혁명의 움직임은 민간기업을 앞세우고 정부가 뒤따라가며 지원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잘되는 나라의 정부는 민간기업을 공정거래의 틀 밖에서는 힘겨루기 상대로 삼지 않는다. 「깜짝 놀랄만한」일을 꾸며 국민의 관심을 사로잡으려는핵심부로부터 규제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견관료에 이르기까지한국정부는 정보화시대로부터 아직도 먼 거리에 있다.
〈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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