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현장] 8. 서울 중구: 3대째 지역구 대물림 가능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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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역풍은 역시 무서웠다. 고래 싸움에 왕새우 한마리 끼어든 셈이라 봤던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꼬마 상어쯤으로 여겼던 이들도 ‘그놈 이빨, 애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두 고래가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는 사이…. 어라, 탄핵 기류를 타고 이 꼬마 상어가 이빨을 번뜩이며 고래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중구의 총선 판세가 딱 그렇다.

중구가 어떤 곳인가. 16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정일형-정대철 부자가 대를 이어 자그마치 13선을 해온 곳이다. 그러나 정대철 의원이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배를 바꿔타고, 또 개인비리혐의로 구속되면서 구도가 달라졌다.

오히려 이달 초만 해도 대결 양상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2파전으로 보였다. 각 당이 공천 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이 지역은 두 당 모두 일찌감치 후보 결정을 할 수 있었다. 그만큼 확실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15대 총선 때 전국 최다 득표 기록을 세웠던 한나라당 박성범(64) 전 의원과 민선 중구청장을 세 차례 지낸 민주당의 김동일(63) 후보다. 유명 방송 앵커 vs 3선 구청장의 혈투가 이 지역 관전 포인트가 되는 듯 싶었다.

열린우리당은 구속된 정 의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채 속만 끙끙 앓고 있었다. 시민단체의 공천 반대 후보 명단에까지 올라 있는 정 의원이 옥중출마를 하겠다고 나서면 어쩌나 하고 내심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대안도 마땅치 않았다. 이형석 동북아평화문제연구원 이사장 등 공천 신청자는 있었다. 그러나 지명도나 지역기반이 다른 당 후보들에 비해 너무 약했다.

그러던 차에 정 의원의 큰아들 호준(33)씨가 막판에 나섰다. 정치 명문의 새 후계자란 간판도 그럴 듯하고 주민들에게 정 의원에 대한 의리(?)도 보여줄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을쏘냐! 열린우리당측은 경선없이 지난 15일 정 후보의 공천을 확정했다.

여기에 대통령 탄핵 소추 정국이란 복병이 가세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급상승했다. 정호준씨의 지지도도 덩달아 급상승했다. 한 일간지가 지난 주말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정 후보는 박 후보를 근소한 차로 제치고 지지율 1위를 차지했다.

과연 '젊은 피' 정 후보가 이 상승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망연자실, 주저앉아버릴 두 고래는 아닌 듯 싶다.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최재풍 지구당위원장을 공천했다.

“정치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1971년생, 한양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뉴욕대(NYU)에서 IT관련 과목(국내엔 생소한 전공명이라 번역하기가 애매하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 2000년부터 삼성전자의 디지털솔루션센터 매니저로 근무. 이것이 정호준 후보의 간단한 이력이다. 정대철 의원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아직 미혼이다.

“솔직히 정치엔 관심이 없었어요. 아버지의 오랜 야당생활 등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한국정치의 구조적 모순 등에 대해 느낀 점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선거 때 아버지를 돕곤 했지만(요즘 지역구를 돌면 정 의원 옆을 따라다니던 그‘꼬마’를 기억하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16대 선거 땐 정 의원의 인터넷 홍보를 맡기도 했다.) 국회 사무실에조차 가본 적이 없었어요. IT쪽을 공부했고 일도 그 쪽으로 인정받아 성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됐네요. 아마 아버지의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제가 정치를 하는 건‘시기의 문제’였을 것 같아요.”

28년 전 정 의원이 그랬다. 1976년 당시 8선 의원이던 아버지 고 정일형 박사가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실형을 받아 의원직을 잃게 되자 미국 유학 중이던 정 의원은 급거 귀국했다. 그리고 정 박사의 지역구인 중구 보궐선거에 출마,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그 때 정 의원의 나이 32세였다.

“할아버지도 아버지의 출마를 결사적으로 만류하셨다던데 이번에 아버지도 제가 나서는 걸 엄청 반대하셨어요. 온가족이 말렸지만 꾸준히 새벽기도 등을 하며 하나님께 여쭤봤습니다. 그리고 답을 들었어요. 할아버지·할머니(고 이태영 박사)께서 애국을 위해, 아버지께서 민주화를 위해 정치를 하셨던 그 뜻을 받들어 우리 민족을 위해 정치할 겁니다. 특히 전 세대 단절의 극복에 앞장서고 싶어요.”

얼마 전 구치소에서 만나고 온 정 의원은 책, 특히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다고 했다. 굿모닝시티 관련 혐의가 억울하다고는 생각하지만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정 의원이 당에 서운한 감정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 후보는 자신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선 것으로 보는 시각은 꺼려했다.

“그런 면을 아주 부인할 수는 없겠죠. 아버지의 상황이 제가 정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아버지와 제 인생은 별개에요. 방법론이나 스타일도 아주 다를 겁니다. IT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잇는 역할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를 사면 다른 하나는 공짜로?=1992년 클린턴이 대선 구호로 사용했던 말 하나가 ‘하나를 사시면 다른 하나는 공짜로 얻습니다’였다. 클린턴을 당선시키면 그와 똑같이 유능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 뛰어난 ‘대통령’(힐러리) 한 사람을 더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박성범 후보에겐 아나운서 출신의 부인 신은경씨가 그런 역할이 아닐까. 최근에도 신씨를 두고 한나라당 전국구 의원 출마설, 선대위 대변인설 등이 돌았다.

“공천심사위에서 여성 후보가 많지 않으니까 본인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여론조사를 했던 게 와전됐어요. 현재 한세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로 일하는 데 아주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가지고…. 어쨌든 지역구민 사이에선 저보다 인기가 좋은 것 같아요. 허허. 그래서 제 대신 할아버지·할머니들 뵈러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용 명함에도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부부 사진을 넣으려고 해요.”

방송 앵커의 위력(?)을 확실하게 보여준 대표적 정치인이 바로 박 후보다. 처음 나섰던 15대 선거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전국 최고 득표를 얻었던 것이다. 너무 쉽게 표를 얻어 자만했던 것일까. 16대 총선에선 정 의원에 아쉽게 패했다.

“대를 이어온 정치 거물의 설욕전은 역시 무섭더군요. 하지만 정 의원이 16대 국회에서 보여준 게 뭔지는 유권자들이 더 잘 알 겁니다.”

그는 또 이번 선거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도중 사퇴하는 지자체장들에 대한 주민 평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김동일 후보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현재 지자체법은 지자체장에게 권한만 줬지 책임을 부가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 걸 이용해 인원과 예산을 자신의 선거운동에 쓴 것 아닙니까. 앞으로의 모델이 될 것이니 만큼 주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당이 아니라 지역을 위해 일해왔다”=물론 민주당 김동일 후보의 생각은 다르다. 3선으로 제한을 둔 구청장의 임기 때문에 더 이상 구민들을 위해서 일할 수 없는 이상, 중앙무대에 나가 더 공헌할 기회를 갖겠다는 것이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서 2년의 공백은 정치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어요.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하고 있으면 우리같은 사람들이 들어갈 틈새가 있기나 하겠습니까? 이렇게 우직한 행정 전문가들이 정계에 입문하면 정치가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는 대통령 탄핵 문제에 대해서는 양비론을 펼쳤다. 여야 3당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 얘기를 꺼냈을 때도 인터넷을 통해“재신임 해주자”고 주장했던 그다. 일단 법에 의한 절차가 진행됐으니 헌재의 결정에 맡기고 지켜보자고 했다.

“탄핵 정국이 이번 선거에 영향은 미치겠죠.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일 수록 누굴 뽑아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지, 유권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할 거라고 믿습니다. 제가 지난 11년간 당이 아닌 중구를 위해 일해 왔다는 걸 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제가 어느 당 소속인가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중구는=남대문·동대문 일대에 상가가 밀집해 있지만 이들 상당수가 이 지역에 사는 주민은 아니라는 점이 독특하다. 지역 발전을 위해 상인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하면서도 주거환경을 해치지는 않도록 하는 균형이 중요한 것이다. 또 최근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고 있지만 대부분 재개발 아파트라는 점이 이 지역 성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각 후보들은 파악하고 있다. 대규모의 새 아파트 단지인 남산타운의 경우 초등학교가 없는 것도 각 후보들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 도심이라 학원 설립·도심개발 등에 규제가 많은 것도 후보들의 공약에 반영될 문제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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