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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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울에 다녀오면 아버지는 늘 활기차 있었고 매사에 의욕을 보였다. 농장과 목장 사이의 농축산연구소 사무실도 늘려 지었다.
외국회사와 기술제휴하여 낙농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에 앞서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여자 사무직원 하나가 읍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기 시작했다.제주댁의 여동생 손녀였다.계일.계원 쌍둥이 형제와는 6촌간이 되는 셈이다.지방 전문대에서 식품영양학을 공부했다는 이 소녀의 할 일은 사무실 지키는 일,전화 응대하는 일,목장과 농장의 작업일지 기록하는 일 같은 것이었는데,일꾼 식사준비등 과외 일까지 시키지 않아도 부지런히 도왔다.
마을사람 알음알이로 그녀를 데려온 아버지는 젊었을 때의 제주댁을 닮았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작고 맑은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이는 단발머리 모습.민첩하고 영리해보이는 것 외엔 별로 특색이 없는 소녀였다.브래지어를 안한 가슴이 청포묵 사발처럼 약간 봉곳한 것으로 봐서 겨우 사춘기에 접어든 듯 했지만 스물한살이라 했다.
겨우내 말린 산장의 알벼를 부대에 옮겨 담는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또 최교수 일이 악몽처럼 되살아나 심란해있는데 산장서 일을 돕던 남편이 급히 내려왔다.
벼 가시가 들어가 눈을 뜰 수 없다는 것이다.
욕실에 뛰어가 세면대 가득히 물을 담아 씻기도 하고,식염수를흘려보내기도 했으나 가시는 영 빠져나오지 않았다.
-벌받은 거야.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서둘러 사무실의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읍내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곧장 아버지가 달려오고 소녀도 그뒤에 따라왔다.
『빨리 타지!』 차 열쇠를 꺼내며 사위에게 독촉하는 아버지 등 뒤에서 소녀가 말했다.
『저어…벼 가시 빼는 비방(비方)을 아는데….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벼 가시는 아주 사나워서 병원가는 중에도 많이 괴로우실 텐데요.』 『비방?』 아버지가 되물었다.
『굼벵이 요법이에요.』 『굼벵이?』 아리영은 끔찍해서 눈썹을모았다. 『해봐주겠니?』 남편이 얼른 응했다.급해맞은 말투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녀는 산토끼처럼 앞마당 끝의 짚더미로 달려가더니 나무막대기로 짚단 아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손마디만한 하얀 것이 두어개 나타나 꿈틀댔다.매미의 유충(幼蟲)굼벵이였다. 재빨리 정결한 물에 헹궈씻더니 소녀는 그 굼벵이 허리를집어들고 남편을 땅에 꿇어앉혔다.눈꺼풀을 뒤집어 굼벵이로 눈알을 살짝 훑어낸다.벼 가시는 거짓말처럼 굼벵이 몸에 묻어나왔다. 남편과 소녀의 얼굴이 거의 맞닿다시피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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